임신은 세상 수많은 여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것이 내 일이 되었을 때는 어떤 방향으로든 한없이 특별해지기 마련인가 봅니다
저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임신을 알았을 때 저는 죽고 싶었습니다.
저는 기혼자이고, 임신을 해서는 안 되는 상황도 아니었으며,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축하해주고 기뻐해주는 임신이었는데도 말이죠.
일반적으로 엄마가 된다는 걸 안 여자들은 모성애 어린 기쁨에 가득찬 모습을 보인다고 알아 왔기에,
이런 저의 우울을 어디 가서 자세히 밝힐 수도 없었고, 나의 괴로움과는 별개로
뱃속에 움튼 생명에게 거듭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여자가 아주 오래 전에 또 있었나봅니다.
게다가 그 여자는 고맙게도 저의 마음과 같았던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글로 남겨주었습니다.
놀랄 정도로 부분부분 제가 겪고 느꼈던 것들과 닮은 부분이 많아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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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속히 이 꿈이 반짝 깨어 "도무지 그런 일 없다" 하여 질꼬? 아니 그럴 때가 꼭 있겠지 하며 바랄 뿐 아니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미구에 믿던 바 꿈이 조금씩 깨져왔다. "도무지 그럴 리 없다"고 고집을 세울 용기는 없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아해다, 태기다, 임신이다, 라고 꼭 집어내기는 싫었다. 그런 중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히 탕 하는 것같이 들리었다 (나혜석 2006, 144)
아아 기쁘기커녕 수심에 싸일 뿐이오, 우습기커녕 부적부적 가슴을 태울 뿐이었다. 책임 면하려고 시집가라고 강권하던 형제들의 소위가 괘씸하고, 감언이설로 "너 아니면 죽겠다" 하여 결국 제 성욕을 만족케 하던 남편은 원망스럽고, 한 사람이라도 어서 속히 생활이 안정되기를 희망하던 친구님네 "내 몸 보니 속 시원하겠소" 하며 들이대고 싶으리 만치 악만 났다(나혜석 2006, 144-145).
생의 인연이란 참 이상스러운 것이다. 나는 이 중에서 다시 살아갈 되지 못한 희망이 났다. '설마 내 뱃속에 아이가 있으랴. 지금 뛰는 것은 심장이 뛰는 것이다. 나는 조금도 전과 변함없이 넉넉한 시간에 구속 없이 돌아다니며 사생도 할 수 있고 책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제 나는 불만하나마 광명이 조금 보였다(나혜석 2006, 148).
이것은 전혀 내 죄이다. 포태 중에는 웃고 기뻐하여야 한다는데 항상 울고 슬퍼했으며, 안심하고 숙면하여야 좋다는데 부절한 번민 중에서 불면증으로 지냈고, 자양품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데 식욕이 부진하여졌다(나혜석 2006, 152-153).
나는 분만 후 영아에게 입힐 옷을 백설 같은 가제로 두어 벌 말라고 꿰매고 있었다. 대중을 할 수가 없어서 어림껏 조그마한 인형에게 입힐만하게 팔 들어갈 데 다리 들어갈 데를 만들어서 방바닥에다 펴놓고 보았다. 나는 부지불각중에 문득 기쁜 생각이 넘쳐 올랐다. 일종의 탐욕성인 불가사의의 희망과 기대와 환희의 염을 느끼게 되었다. 어서 속히 나와 이것을 입혀 보았으면, 얼마나 고울까, 사랑스러울까. 곧 궁금증이 나서 못 견디겠다. 진정으로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만든 옷을 개켰다 폈다, 놓았다 만졌다 하고 기뻐 웃고 있었다. 남편이 돌아와 내 안색을 보고 그는 같이 좋아하고 기뻐하였다. 양인 간에는 무언 중에 웃음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이는 결코 내가 일부러 기뻐하렸던 것이 아니라 순간적 감정이었다. 이것만은 역설을 가하지 않고 자연성 그리로를 오래 두고 싶다. 임신 중 한번도 없었고 분만 후 한번도 없는 경험이었다(나혜석 2006,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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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도 임신을 의심했을 때 제발 아니기를 바랬고, 하지만 바짝바짝 다가오는 임신의 여러 징후에
결국 항복하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다 자란 성인의 일이니 임신의 책임은 오로지 저와 남편에게
있는 것이겠지만, 제 상황은 고려치 않고 임신을 부추긴 주변 사람들이 밉기까지 했습니다. 임신 초기, 심한 우울로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만을 하고 울음을 울면서 절대로 아이에게 보탬이 되지 않을 그 행동들을 뱃속 생명에게
미안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초음파를 보고, 때때로 희망적인 생각도 해 보고, 그러다가 이르지만 아기옷을
사 들여 매만지고 하면서, 그 옷을 입은 아기가 저에게 '엄마'라고 부를 날을 상상하면서 조금씩 아기에게
정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임신을 하면, 자식을 가지면 그 순간부터 아이가 엄마 자신보다 최우선이어야 하고, 아이를 위해
임신시부터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몰아가는 세상의 어떤 시선에 굉장히 불편함을 느낍니다.
실제로 겪어 보니 그것은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는 생겨나는 데 좀더 시간이
걸리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이를 위해서 엄마 된 사람은 그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으로
자기 자신을 조심해야 하겠지만, 남들이 그것을 강요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단죄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에게도 꽤나 놀랍게 다가온 표현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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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잠은 보물이요 귀물이다. 그러한 것을 탈취해 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고 정의를 발명하여 재삼 숙고하여 볼 때마다 이런 걸작이 없을 듯이 생각했다 (나혜석 2006, 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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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첫 육아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엄마의 고통은 82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요.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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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오는 때 잠자지 못하는 자처럼 불행 고통은 없을 터이다. 이것은 실로 이브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죄값으로 하나님의 분풀이보다 너무 참혹한 저주이다. 나는 이러한 첫 경험으로 인하여 태고부터 지금까지 모든 모가 불쌍한 줄을 알았다. 더구나 조선 여자는 말할 수 없다. 천신만고로 양육하려면 아들이 아니요 딸이라고 구박하여 그 벌로 축첩까지 한다(나혜석 2006,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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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의 이야기이니, 지금과는 약간 사정이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여자들에게 아직은 암흑기나 다름없었던 그 시절 자신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그 시절 당연시되었던 모성애에 대해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