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그 여자네 집/김용택 (정말 기네요...)

박명기 조회수 : 1,801
작성일 : 2011-12-13 20:12:45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셋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알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손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세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시. 김용택

IP : 220.117.xxx.38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ㅇㅇ
    '11.12.13 8:21 PM (121.130.xxx.78)

    에그~
    그냥 그 여자랑 결혼해서
    처가집으로 만들 것이지...

    그랬음 이런 시는 안썼겠지만 ㅋ

  • 2. 어머
    '11.12.13 9:48 PM (180.66.xxx.84)

    그분은 이걸 외우셨단 말이죠???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59732 집안에 용띠가 3명이면 정말 좋은걸까요? 12 궁금 2012/01/18 14,446
59731 유시민 노회찬의 <저공비행 1탄> 필요하신 분 손드세.. 3 깨룡이 2012/01/18 527
59730 (급합니다)서래마을에 교수님과 식사할 곳 있을까요? 9 윤쨩네 2012/01/18 1,071
59729 아침에 몇시에 일어나세요?? 8 ... 2012/01/18 1,994
59728 왜 싹난 감자는 주셨을까요? 40 이해하기 2012/01/18 4,399
59727 선물뭐해야하나요? 2 고모 2012/01/18 383
59726 제사음식에 파를 사용하지 않는다.... 13 .... 2012/01/18 16,442
59725 이삿짐 보관 해보신분~~ 셀프스토리지? 2 으아아아악 2012/01/18 1,310
59724 종편, 애국가 시청률에 매출은 월 30억원? 1 나루터 2012/01/18 696
59723 노트북이 안 꺼져요 T T 도와주세요~ 2 웃자맘 2012/01/18 2,369
59722 장마저축은 언제까지 연말정산 대상이 될까요? 4 궁금 2012/01/18 1,464
59721 남매끼리서로 과외 가능한가요? 10 가르치다. 2012/01/18 1,253
59720 국산 코렐스타일 그릇 써보신분 계세요? ... 2012/01/18 1,552
59719 남편이 대기업 다녀도 먹고살기 빠듯하네요 54 정말이지 2012/01/18 15,739
59718 주식.. 공부하면 잘할수 있는건가요? 8 주식공부 2012/01/18 1,725
59717 강용석 의원, 의사에 고소 당해 5 세우실 2012/01/18 1,459
59716 민주당 모두 쇼였구나 4 연기 2012/01/18 1,600
59715 공짜폰으로 스맛폰준다고 해서 갔더니... 스맛폰 2012/01/18 1,006
59714 코스트코와이셔츠 후기 및 아이들츄리닝,청바지 있는지..-꼭 답변.. 4 /// 2012/01/18 2,014
59713 자동차 수리& 폐차 고민요.. 25 밤새고민중 2012/01/18 2,015
59712 급! 명동갈 일 있는데 오늘 차 많이 막힐까요? 1 궁금이 2012/01/18 362
59711 초등입학고민... 조언을 구합니다. 6 톡털이 2012/01/18 680
59710 정소녀 "흑인대통령 아이 가졌다는" 루머에 대.. 4 호박덩쿨 2012/01/18 3,316
59709 행사 사회볼때 소개할때도 박수, 끝날때도 박수 치도록 유도해야 .. .. 2012/01/18 373
59708 둔산여고 학생들이 교장이 모든걸 은폐했다고 난리네요 4 정의 2012/01/18 2,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