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철씨는 1940년 6월 1일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 비아리에서 무면허 치과의사인 김정규(金正奎)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규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 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마을 서당에서 어깨너머로 한학을 배워 당시의 농촌 청년으로서는 상당히 눈이 틘 편이었다.
그러나 부쳐먹을 땅이 한 뼘도 없었던 그는 농촌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홀연히 고향을 떠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나이 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 땅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년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채 고향을 떠난 그는 2년 후 무면허 치과 기공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정규가 의사선생이 되어 돌아왔다’ 고 반겼으나 가난한 고향 마을은 그의 기술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김정규는 시골 장터나 연고지를 찾아 다니면서 돌팔이 치과 의사 노릇을 하다가 한 살 아래인 배점선(裵點仙)을 만나 비아리에 정착하고 가정을 꾸몄다.
가난한 집에 자식이 많다는 속담대로 그들은 자식을 많이도 낳았다. 큰 딸 재선(在善), 둘째 딸 재복(在福), 큰아들 만술(萬述), 셋째 딸 재희(在姬), 넷째 딸 재남(在男), 둘째 아들 만선(萬先; 김만철의 본명)을 낳기까지의 20년 동안 김정규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돈을 벌여야 했고 아내 배점선은 날품팔이를 해주고 얻은 곡식이나 음식으로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해왔다.
그러나 농한기에는 그나마 품팔이도 할 데가 없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자식들을 친척집에 맡겨놓고 황아 행상을 하면서 남편과 함께 유랑생활을 했다.
그러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날이 갈수록 경찰의 단속이 심해져 돌팔이 의사 노릇마저 해먹기가 어렵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뜸해지자 아이들을 맡긴 친척집에서도 아이들을 데려가라는 독촉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입을 줄이기 위해 17세 된 큰 딸 재선을 함평(咸平)으로 출가시킨 김정규는 생각다 못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봄, 전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갔다. 김만철의 나이 한 살 때였다.
치과 의사가 귀한 북간도에서, 김정규는 기술을 인정받았다. 가난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아내도 몸을 아끼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착실히 돈을 벌었다.
그러나 북간도에서 낳은 다섯째 딸 선녀(仙女)까지 합쳐 식구는 다시 열 명으로 늘어났고, 게다가 아내는 여덟 번 째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어려운 형편에 먹고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났다.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던 조선 사람들의 처지가 곤란해져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기가 어려웠다.
김정규는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여 만삭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1943년 겨울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동안 모은 전재산을 몽땅 털어 평생 소원이던 자기 논 두 마지기를 장만하고 고향에 뿌리를 내릴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 결심도 잠깐이었다. 그 논은 이미 수리조합에 편압되어 있었다. 거간군의 농간에 속아 그것도 모르고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그 무렵 아내는 셋째 아들 동철(東哲)을 낳았다. 그러나 논을 빼앗긴데 충격을 받은 아내는 미처 몸조리를 할 사이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일주일 만에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전재산과 아내를 잃은 김정규는 돈이 없어 상여도 장만하지 못하고 아내의 시신을 거적에 말아 지게에 지고 동네 앞 야산에 장사 지냈다.
고향 비아리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말았다. 완전히 허탈 상태에 빠진 그는 며칠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마침내 비정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출가한 큰 딸만 남겨둔 채 젖먹이까지 딸린 일곱 명의 아이를 데리고 다시 만주로 향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큰 딸 재선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아버지, 뭣 땜시 고향을 영영 떠나려고 한다요. 나는 외로워서 어떻게 살란 말이요. 어머니의 산소는 또 누가 보살핀단 말이요. 정 가시려거든 동생 하나라도 남겨놓고 가시오, 잉.”
“재선아, 너를 두고 떠나는 아비의 마음도 찢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것냐. 이 어린 것들을 굶어 죽게 하지 않으려면 이 고장을 떠나는 수밖에 없구나. 동생 하나라도 맡아 기르겠다는 네 마음은 고맙다만 너까지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 어머니 산소는 미안하지만 네가 좀 보살펴다오. 나는 이 나이에 어찌될지 모르지만 이 많은 식구 중에 한 놈이라도 살아 남는 놈이 있다면 틀림없이 또 만날 날이 있을 거여. 너무 상심말고 굳세게 살아야 헌다. 알것냐?”
김정규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1944년 봄, 김만철이 네 살 때였다. 그것이 그 가난한 일가의 이별이었다. 아니, 더 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화전촌의 여장부
두만강 너머의 북간도를 목표로 하여 북상길에 올랐던 김정규 일가는 두만강을 마주보는 국경 도시 종성(鍾城)에서 발이 묶였다.
제 2차 대전의 종전을 1년 가량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세는 대역전극을 전개하고 있었다. 태평양에서는 맥아더 원수의 ‘징검돌 작전’이 주효하여, 초전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일본군은 패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 반도에 상륙하여 일거에 전세를 만회, 히틀러의 목을 죄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7년 동안이나 일본의 침략 전쟁에 시달려온 중국군이 서서히 사기를 회복하여 일본군에게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는 등,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가열되고 있었다.
북간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 발판으로 괴뢰 만주국이 수립된 이래 10여 년 동안, 폭압에 시달려온 중국 민중들이 차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약삭빠른 일본인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하나 둘씩 간도를 떠나기 시작했다.
두만강 연변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김정규는 마침내 북간도행을 포기하고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젖먹이 동철과 두 살짜리 딸 선녀를 큰 아들 만술과 둘째 딸 재복에게 업히고, 자신은 만철의 손을 잡았다. 김정규가 찾아든 곳은 함경북도 종성군 남산면 동포리라는 산골 마을이었다.
사방으로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고, 골짜기에 통나무로 엮은 귀틀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형적인 화전 마을이었다. 꽤 넓은 골짜기에는 여기저기 불을 질러 밭을 일군 흔적이 남아 았었으며 그 옆에는 골라낸 나무 뿌리와 돌멩이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이 낯설었던지 일곱 살짜리 재남이가 물었다.
“아버지, 여기가 북간도야?”
“북간도? 허, 북간도는 아니다. 하지만 어디면 어떠냐. 어차피 떠돌아다니는 몸, 아무 데나 자리잡고 살면 그만이지.”
김정규는 황량한 골짜기를 둘러보면서 자조하듯이 중얼거렸다.
그 마을 사람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인정이 많았다. 중년의 홀아비가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을 올망졸망 데리고 마을로 들어서자 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아낙네들이 몰려왔다. 흔히 화전민들은 곡식을 심은 뒤 거름도 주지 않고 김도 매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곳 화전민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웬 비렁배가 여기까지 왔을꼬.”
맨 앞에 선 주름투성이의 노파가 들으라는 듯이 말하자 김정규는 피식 웃었다.
“할망이, 우리는 비렁뱅이가 아니오.”
“비렁배가 아니면 왜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이 산골까지 왔소?”
김정규는 자기들의 몰골이 거지로 비친 것이 서글펐으나 아무튼 아낙네들의 환심을 사야겠다는 생각에서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런 쯧쯧, 그럼 어미 젖도 먹어보지 못하고 이레 만에 어미를 잏었단 말이지. 전라도에서 왔다고 했소?”
“예.”
“그래, 그동안 뭘 먹였소?”
“쌀을 좀 갖고 다니다가 가끔 암죽을 끓여 먹이고는 했읍죠.”
“쯧쯧, 저 핏덩이가 오죽이나 배가 고팠을까. 이봐, 뭘하고 있는 거야. 증산댁은 저 아기에게 젖이라도 좀 물리지 않고.”
노파가 소리치자 30대의 건장한 아낙네가 등에 업은 아이를 추스른 다음, 만술이가 없고 있던 아기를 얼른 받아 안았다.
“그래, 다른 식구들은 뭘 먹고 지냈소?”
노파가 물었다. 말투는 거칠었으나 포근한 인정이 느껴졌다.
김정규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내의 장례비에도 쓰지 않고 마지막까지 아끼고 있던 노자마저 떨어진 지가 오래였다.
“쯧쯧, 비렁배가 따로 있나. 보아하니 온 식구가 쫄쫄 굶고 있었구만. 안 되겠다, 우선 우리집에라도 좀 들어갑세.”
노파는 김정규 일가를 데리고 산기슭의 귀틀집으로 갔다. 5, 6명의 아낙네가 따라들어왔다.
“온성댁, 자네는 어서 막국수를 좀 삶고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좀 가져와.”
노파의 위엄은 절대적이었다. 아낙네들은 제각기 먹을 것을 가져왔다. 가난한 화전 마을이었다. 강조밥과 감자떡, 풀떼기, 수수떡 따위가 고작이었으나 건목친 소반에는 금방 음식이 가득했다.
“산골이라 먹을 것은 없지만 배고플 테니 어서 먹어라. 그러고보니 어린 것들이 수태 많구만. 다 댁의 자식이오?”
“예.”
김정규는 목이 메었다.
“할망이, 고맙습니다.”
“고마울 것 없어.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고향 떠난 사람들이라 수태 고생들을 했지. 이 증산댁만 해도 지난 겨울 남산 만한 배를 안고 들어와 우리집에서 몸을 풀었지. 어디 그뿐인가, 온성댁, 경원댁, 종성댁.......”
“할머니, 이제 그만 하시오. 또 흉보시려고.......”
국수를 말고 있던 온성댁이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흐흐....... 이게 어디 흉인가. 다 사람 사는 내력이지. 그래, 댁은 이 많은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할 셈이오?”
노파는 화제를 돌렸다.
“글쎄요, 막막합니다. 마냥 떠돌아다닐 수도 없고, 어디엔가 정착은 해야겠는데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농사는 지어봤소?”
“아직.......”
“영 반거충이로구만. 농사도 못 지으면 뭘 먹고 살 셈이오?”
“할망이, 농사도 땅이 있어야 지을 게 아닙니까?”
“땅? 땅이 왜 없어?”
“예?”
김정규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는 어디 제 땅 가지고 농사짓는 줄 아나. 이 골짜기만 해도 땅은 얼마든지 있지.”
“그, 그럼 저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식 새끼들을 데리고 집집마다 빌어먹지 않으려면 농사라도 지어야지. 안 그래?”
노파는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정 갈 데가 없으면 할머니 말씀대로 하시오. 여기 사람들도 모두 비렁배짓을 하고 다니다가 할머니를 만나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증산댁이 말했다.
“하, 할망이, 잘 부탁합니다.”
김정규는 지옥에서 부처님이라도 만난 것 같은 심정으로 넓죽 절을 했다.
“나한테 부탁해봐야 소용없어. 나중에 남정네들이 돌아오면 의논해 보시오.”
18가구가 사는 그 동포리 화전 마을에 김정규 일가가 눌러 앉게 된 것은 여름의 문턱으로 들어선 6월 하순이었다.
63세의 노파는 이 마을의 어른이며 지도자였다. 그가 어디에서 흘러왔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거의 같은 연배의 남편과 함께 이 황량한 골짜기에 귀틀집을 짓고 정착한 것은 10여 년 전이었다. 물론 마을도 사람들도 없던 시절이다.
그들 부부는 골짜기에 불을 질러 밭뙈기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한편, 남편은 매일같이 총을 들고 산을 넘나들면서 사냥을 했다. 주로 산토끼나 꿩 따위의 작은 동물이었으나 솜씨가 좋은지 허탕치는 날은 거의 없었다.
아내는 열흘에 한 번꼴로 그것들을 들고 읍내로 내려가 소금이나 일용품으로 바꾸어 왔다. 웬일인지 남편이 읍내로 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3년 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총을 들고 산으로 들어간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깊은 눈속을 헤매던 아내는 마침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마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내는 장날마다 읍내로 내려가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을 데려왔다. 그중에는 홀몸도 있었지만 식구까지 딸린 사람들도 많았다. 만주에 가면 큰 수나 생기는 줄 알고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가 오도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거나 징용을 피해 도망쳐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수가 10여 명에 이르자 노파는 말했다.
“비렁배짓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남에게 빌어먹는 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닐세. 사지가 멀쩡한 놈들이 왜 남에게 빌어먹나.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길이 있네. 내가 자네들을 데려온 것은 자네들의 사정이 딱해서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일세. 자네들도 보면 알겠지만 여기는 임자없는 산골이야. 뜻만 있으면 여기에 밭을 일구어 곡식도 심을 수 있고 산에 가서 사냥을 해서 먹고 살 수도 있네. 이곳에 집을 짓고 나와 함께 살아볼 생각이 없는가. 10년을 작정하고 열심히 땀을 흘리면 자네들에게는 저절로 살길이 열릴 걸세. 어떤가, 뜻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 남고 싫은 사람은 떠나도 좋네.”
“할머니, 제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동안 몸을 의탁하면서 노파의 인품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두 가지만 약속을 해주게. 10년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겠다는 것과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달라는 것일세.”
“.......”
“원래 화전이란 원시적인 농경법이기 때문에 몇 년 동안 부쳐먹다가 지력이 다하면 그 땅을 버리고 새로운 땅을 찾아나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알려져 있네. 그렇다면 떠돌이생활이나 다를 것이 없지. 이왕에 자네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릴 결심을 했다면 여기에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보게. 그러자면 이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 오랫동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야 되네. 여기뿐만 아니라 이 근처의 골짜기나 빈터를 모두 개간해서 새로운 마을을 이룩해 보자는 것일세. 어떤가?”
“좋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활기차게 대답했다. 노파는 화전을 일구는 방법과 거름 만드는 법, 통나무로 집을 짓는 법, 올가미 만드는 법과 덫을 놓는 법, 맹수를 피하는 법 등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사람들은 노파의 논리적인 말솜씨와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둘렀다.
“할머니, 할머니는 그런 걸 어디서 배웠습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배우기는 뭘 배워. 오래 살다 보면 터득하게 되는 거지. 그보다도 자네들에게 꼭 부탁할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나는 10년 전, 영감과 단둘이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터전을 닦았네.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도 좀 모았지. 그런데 3년 전 눈이 몹시 오던 겨울날 영감은 사냥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네. 필시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거나 무슨 변을 당해 죽은 것이 틀림없는데 3년 동안이나 찾아보았지만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했네. 여자 혼자 힘으로는 저 험한 산들을 샅샅이 뒤져볼 수가 없었던 걸세. 그래서 자네들을 청해 온 걸세.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나는 어차피 이곳에 뼈를 묻을 작정을 했으니 내가 죽고 나면 자네들이 뼈나 좀 묻어주게. 그리고 산에 갈 때는 잊지말고 영감의 시신을 좀 찾아봐 주게. 몸은 이미 어느 풀그늘에서 백골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영감의 유물인 총은 남아 있을 테니 그거라도 찾아서 함께 묻어주면 한이 없겠네.”
노파는 말을 마치고 눈시울을 적셨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부부애에 큰 감동을 받았다.
3년 후, 이 산골에는 하나의 작은 마을이 생겨났다. 초창기의 사람들뿐 아니라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과 길을 잃고 헤매다가 찾아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총무덤’의 설화
“그래, 영감님의 시신은 찾았나요?”
김정규는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날 저녁, 사냥에서 돌아온 마을 남자들과 수인사를 나누고 산비탈에 둘러앉아 수수 소주를 나누는 자리였다.
“웬걸요. 이 산들이 오죽이나 깊습니까. 매일같이 손을 나누어 영감님이 자주 다녔다는 곳을 샅샅이 훑고 있지만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계곡들이 수두룩하지요.”
온성에서 왔다는 40대 남자가 말했다.
“매일 산에 가면 농사는 어떻게 합니까.”
“여기 농사는 할머니가 다 짓지요.”
“예?”
김정규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헛허, 농사라야 조, 수수, 메밀, 감자 따위가 고작이지만 남자들은 퇴비나 만들어주고 밭고랑이나 손질하면 그만이지요. 씨뿌리고 거름주고 김매는 것은 여자들이 다 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할머니가 다 알려주니까 할머니가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나도 한때 화전을 일구어 보았지만 거름주고 김매는 것은 처음 봤어요.”
“거, 대단한 할머니시로군요.”
“여장부지, 여장부. 어디 그뿐인 줄 아시오. 지난 겨울에는 사냥총을 구해와서 사냥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셨단 말이오.”
“총 쏘는 법 말인가요?”
“그렇지요.”
김정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화전을 일구어 거름을 주고 김을 맨다는 것은 옛날 변경을 지키던 둔전병(屯田兵)들이 간혹 사용하던 방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여자가 올가미와 덫을 만들고 사격술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김정규의 머리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북간도에 있을 때,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는 독립군 중에 왜경에게 쫓겨 피해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감님과 함께 이 깊은 산골에서 숨어 살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튿날 아침 김정규는 노파에게 불려갔다.
“당신은 농사도 지을 줄 모른다고 했는데 그럼 뭘 할 줄 아시오?”
“치과 기술을 좀 알고 있습니다.”
“치과? 이빨 고치는 거 말이오?”
“예.”
“여기선 그런 거 필요없어. 또 할 줄 아는 게 뭐요?”
“한학을 좀 배웠습니다.”
“한학? 그런 것도 소용없어. 그따위 짓이나 하고 있었으니 비렁배가 될 수밖에 없지. 이런 난세에는 실용적인 공부가 필요해. 아무튼 여기에 눌러앉겠다니 농사지을 땅과 씨앗, 농구는 내가 대주겠소. 곧 씨를 뿌릴 때가 됐으니 오늘부터 당장 밭을 일구시오. 아이들 나이가 몇 살이오?”
“큰 딸이 열 아홉, 큰 놈이 열 여섯, 그 밑의 계집아이가 열 살, 일곱 살이고 그 아래는 모두 어립니다.”
“그럼 일곱 살 이상의 아이들은 모두 일을 하게 하시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어릴 때부터 체험하게 해야 하니까. 집은 요 옆에 빈 집이 하나 있으니 그것을 쓰도록 하시오.”
“할망이, 고맙습니다.”
김정규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빈인사는 필요없어. 잘 사는 것이 보답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손재간이 있을 것 같으니 야장간(대장간)을 하나 만드시오.”
“예? 그건 해본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반거충이지. 해본 적이 없으면 읍내에 가서 풀무나 하나 사오시오.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그럼 농사는 어떻게 합니까?”
“농사는 아이들에게 맡기면 돼. 그까짓 일에 다섯 식구나 매달릴 셈이오? 여기는 야장간이 없어서 호미 하나라도 망가지면 그대로 버리고 있어. 물자의 낭비지. 그것들을 재생해서 쓰잔 말이오. 우리 마을의 일이 없을 때는 이웃 마을 것도 고쳐주도록 합시다. 서로 돕고 살면 얼마나 좋겠소.”
노파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김정규는 노파에게 떼밀리다시피 읍내에 나가 대장간에 필요한 풀무와 망치 따위의 물건을 사왔다.
저녁 무렵에 돌아와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파가 밭을 일구라고 지시한 들판에는 20여 명의 여자들이 줄을 지어 늘어앉아 열심히 호미질을 하고 있었고 그 뒤쪽에는 잡초가 말끔히 뽑힌 지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노파의 모습도 보이고 네 살짜리 만철이가 풀을 한 아름 안고 가장자리로 옮기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김정규는 한동안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노파의 위대성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김정규는 이튿날부터 노파의 지도를 받아가며 대장간을 개업했다. 그동안 노파의 헛간에 버려져 있던 수십 자루의 호미와 괭이, 낫, 곡괭이, 삽, 쇠스랑 따위가 일감으로 들어왔다.
남자들의 말처럼 농사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덟 식구의 식량은 집집마다 추렴을 해서 보내온 곡식만으로도 충분했다. 김정규의 집에는 오랜 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가을이 되자 그 공동체 마을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에 있는 산기슭과 골짜기에서는 조, 수수, 귀리, 메밀, 콩, 팥, 피 등 가지가지 곡식을 가득 실은 지게들이 연일 줄을 이어 마을로 들어왔다.
가을걷이가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동네 공터에 둘러앉아 잔치를 베풀었다. 집집마다 손을 나누어 마련한 음식은 맛깔스럽고 풍족했다. 돼지고기, 닭고기, 꿩고기, 토끼고기에다 갖가지 부침개에 수수 소주가 곁들여지자 잔치는 흥이 났고 사람들은 포식을 했다.
겨울이 되어 대장간의 일이 없어지자 김정규는 마을의 남자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 노파가 건네준 사냥총을 들고 산 속으로 들어간 김정규는 산을 타는 일에 서툴지가 않았다. 아니, 돌팔이 치과의사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그는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첫 사냥에서 토끼 두 마리와 장끼 세 마리를 들고 가자 노파는 놀란 듯이 김정규를 바라보았다.
“정말 당신이 잡은 거야?”
“물론이죠. 이 양반,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저는 따라가지도 못하겠던걸요.”
같이 사냥을 나갔던 젊은 남자가 말했다.
노파의 눈이 번쩍하고 빛나는 것 같았다.
“그래? 참 희한한 일이군. 그래 어디로 갔었소?”
“글쎄요. 이름은 모르지만 저 함지처럼 생긴 산으로 갔지요.”
“저 산을 영감은 함지박산이라고 불렀지. 거기에 잔짐승들이 많던가?”
“글쎄요. 눈에 띄길레 잡았을 뿐입니다.”
“혹시....... 거기에 범처럼 생긴 바위가 안 보이던가?”
“글쎄요.......”
김정규의 대답은 여전히 흐리멍텅하다.
“알았어.수고했네. 다음에 또 가게 되면 범바위를 좀 찾아봐 주게. 그곳을 자주 간다고 했는데 어느 산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노파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틀 후 김정규는 다시 함지박산으로 갔다. 노파의 애절한 사연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 범바위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절을 헤매었어도 범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만철이에게 주려고 겨우 다람쥐 한 마리를 사로잡아 허리에 찬 망태에 집어넣고 있는데 발밑에서 후닥닥거리며 달아나는 것이 있었다.
토끼였다. 김정규는 황급히 망태 아가리를 여미고 총을 겨누었으나 토끼는 수풀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하면서 달아나고 있었다. 김정규는 엉거주춤 총을 겨눈 채 쫓아갔다. 그러나 토끼는 이내 야트막한 언덕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정규는 맥이 빠져 어슬렁어슬렁 언덕에 올라갔다. 언덕 기슭의 풀밭에 앉아 요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감자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바위투성이의 골짜기 너머로 가파른 산등성이가 보였다. 마을에서 마주보이는 산의 뒤쪽이었다. 앞쪽은 경사가 완만해서 밭이 일구어져 있지만 뒤쪽은 몹시 가파랐고 또 골짜기와 접한 부분이 낭떠러지여서 좀처럼 올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산을 우연히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때 김정규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낭떠러지뒤에 제법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중앙에 조그만 언덕이 보였는데 마치 부풀어오른 것처럼 솟아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
김정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토끼가 달아난 언덕 너머로 달려갔다. 마치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그 언덕의 모습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
다음 순간 김정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범바위였다. 아니, 범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의 언덕이었다. 9부 능선쯤에 시꺼먼 바위가 하나 드러나 있었는데 마치 범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노파가 말한 범바위가 틀림없었다.
이튿날 마을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노파를 비롯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산의 뒤쪽과 낭떠러지 밑의 골짜기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골짜기의 바위 틈에 떨어져 있는 사냥총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백골을 찾아냈을 때 노파는 김정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고맙네, 고마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범바위가 여기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네. 당신은 은인일세. 총이라도 찾았으면 했는데 유골까지 찾게 되었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할망이의 지성 때문이지 지가 무슨....... 그보다도 영감님의 유골을 더 수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만하면 됐어. 벌써 3년이나 되었는데 그동안 이 골짜기에는 봄, 여름으로 물이 많이 흘렀으니까 이미 멀리멀리 떠내려갔을 걸세. 이것이 떠내려가지 않고 있었던 것만도 기적같은 일이지.”
노파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범바위 밑의 양지바른 언덕에 무덤을 만들어 유골과 총을 묻고 제사를 지냈다. 사람들이 그 무덤을 ‘총무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