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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 관련 글을 보다 드는 생각

존스매트릭스 조회수 : 1,992
작성일 : 2011-12-08 18:37:57

사교육쪽에 몸 담았던 과객입니다.

저는 힘들고 고달픈 문과쪽은 아니고, 과고 나와서 과학원 나온 평탄한 학습 트리를 따라 온 준영재 정도의 학생이었습니다.

오랜 과거라, 지금처럼 과외나 학원가는 없었지만, 학습 의욕은 대단히 커서, 나가서 노는 시간보다,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것 말고는 한 게 별로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가장 안타깝고 후회스럽고, 늦게 배운 도둑이 날밤 새우는 줄 모른다고, 중년에 음주가무를 즐기는 폐단을 겪고 있습니다만.. T.T

선행학습은 누구나 생각할수 있듯이 장단이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면허 따기 전에 벌써 친구들 차 빌려서 운전 연습해 왠만한 베테랑보다 잘 운전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잘 타게 되면, 주의깊에 찬찬히 운전하지 않고, 과감하게 끼어들기도 잘하고, 속도도 마구 내다가 사고가 나면 좀 크게 납니다. 이에 반해, 운전 못하고, 현재 배움에 충실한 초보는 차에 우선 "초보 운전"를 딱 붙이고 정말 조심해서 몹니다. 운전 조작 미숙으로 사고만 안난다면 안전하게 운전 잘 하지요.

공부도 선행학습이 과해서,  3, 4년 몫을 미리 다 안다면, 수업시간이 너무 시시해 집니다. 때론 선생님은 나보다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라는 판단도 하게 됩니다. 기존에 미리 선행학습 했다 하더라고, 내실을 기해야 할 현재는 등한시 하고, 고급 기술인 몇 년 후의 선행학습에만 무한 정진하게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 스스로가 잘 따라오고, 본인도 원하고, 학문적인 호기심이 대단해서 공부를 한다면, 못하게 막진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강요하는 몇년치 앞선 선행학습은 때때로 아이들을 힘겹게 하고,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문제를 좌르르 풀게는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기도 합니다.

재벌가의 딸로 태어나서, 다들 행복하게 살아가는줄 알고 살던, 머리 좋은 여대생이 대학때 사시 합격해서 판사가 되어서, 빵 한 조각 홈친, 배고픈 장발장의 재판을 하게 될 때, 법리 이상의 판단은 불가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주로 과학고 학생들이나, 중학교에서 화학올림피아드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원에서 주 타겟은 중2 정도 되는 아이들을 화학 올림피아드 입상을 통해 과학고에 입학시키고, 과학고에 들어간 애들을 계속 가르쳐서 세계 올림피아드 출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 1학기때 중학교 화학을 거의 떼가고, 2학기 무렵까지 다 끝낸후, 고등학교 화학을 시작합니다. 중학교 1학년때까지는 고등학교 화학의 심화학습을 병행하면서, 대학 1학년 수준의 일반화학을 시작합니다. 이때 좀 빨리 따라오는 애는 중학교 1학년 말이나 중학교 2학년 초부터 대학교 2학년 과정의 유기화학, 무기화학, 물리화학 3종세트를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과학고 준비할 때는 비교할 엄두도 못 낼만큼 아이들의 학습량과 수준은 높았습니다.

문제풀이 능력은 정말 뛰어나서, 왠만한 대학 1학년 화학과 아이들 수준으로 금새 풀어냅니다. 화학식 전개, 수식 전개에 막힘이 없습니다.

사실, 올림피아드 문제는 교과서 밖의 창의적인 문제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예상 가능한 틀의 창의적 문제입니다. 그래서, KMO건 화학올림피아드건 어려운 창의적 문제의 패턴도 반복적이고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친구들에게 문제를 아주 색다르게 비틀어서, 일상생활 속에 적용한 예를 만들어 물어보거나,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문제를 내면 상황은 금새 달라집니다. 그 어려운 문제들은 척척 풀어내면서, 풀이의 난이도 면에서더 낮지만 깊이 있는 이해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문제는 오히려 헤매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느낌은 2020년 미국과 중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전망 보고서를 내라고 하면, 수십페이지를 줄줄 써낼 analyst가 치킨집 장사가 안되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삼촌의 부탁에 딱히 처방을 못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강제적으로 하는 아이는 없는것 같았습니다만, 정말 화학을 좋아해서 초등학교때부터 화학올림피아드를 준비하다기 보다는,  엄마의 정보력-KMO는 경쟁율이 너무 세, 물리는 너무 어려워, 이쪽 학원이 화학이 강해. 등등의..-에 기인해서 이곳에 있게 되었을 확률이 필히 높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부는 물론 아니었습니다만.

정말 과학고 가기 쉬웠던 25년전에, 중학교때 중학교 진도만 나갔던 저에게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더 고 난이도의 수학 문제를 풀어보고 싶은 마음. 제 자식이 저와 같다면 저는 기꺼이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채만식 선생님의 글 제목같은 레디메이드 인생을 every detail까지 부모가 설계하는게 안타깝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보면서 공감하던 어린 시절을 상기해보면, 자식의 학습 프로그램을 재단하는데 올인하는 일은 시스템의 문제건, 그 시스템을 따라가는 우리의 문제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소견은 예습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매일 학교에서 더 어려운 내용을 마주치게 하는것은 곤혹스러운 일일테니까요. 다만, 아이의 수준을 감안해서, 적절한 예습(필요에 따라 일주일에서 일년 정도)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아들에게 구상하는 일은 복습은 self로 하게 하겠지만, 수업을 잘 따라가다면, 예습보다는 심화에 더 비중을 두고 싶습니다. 사칙연산을 마침 뗀 아이에게 도형이나 방정식으로 바로 넘어가기 보다는, 이를테면 4()4()4()4=? 문제를 던져주고, ()안에 사칙연산을 채워넣어서 ?자리에 1부터 20까지의 자연수중에 만들수 있는 수와 만들수 없는수에 대해서 일주일간 매일 조금씩 공부하게 한다는 식으로, 배운것을 더 깊이있게 쓰게 하는게 중요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화와 예습을 결합한 학습도 구상중입니다. 이를테면, 생소한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초등학생 시각에서의 "정수론" 같은걸 가르쳐줘서, 수의 원리와 깊이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다들 고민되면서 생각하시는게 많겠지만요.

심화학습 교재는 아이의 학습 load와 수준에 따라 학기별로 한권식 사서 풀게 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 찾아서 프린트해주시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분량은 적당히 적은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학년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에 30분 정도 어려운 문제 한 두 문제로 깊이 있게 고민해보고, 이해해 가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목적은 현재 배운것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학문의 즐거움 발견으로 삼는다면요.

 

이 심화학습의 폐단도 물론 있습니다. 현재 진행하는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이에게 좌절을 맛보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부모의 역할은, "자식이 나 닮아 천재일꺼야. 혹은 머리가 나쁠꺼야"라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찬찬히 학습능력을 들여다 보면서 적절한 modulator로서 아이의 수준에 맞춰서 이끌어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연애만큼 교육도 정답은 없는게 우린 서로 다 다르니까요. 이 나름 긴 글을, 시간 나서 열심히 여기까지 읽어 내려오신 분도 몇 명은 있을테고, 한 두줄 읽다가 분량에 놀라 댓글로 바로 가보거나 back을 선택한 사람도 많이 있겠지요.

그런데, 아이도 원하고, 부모도 원해서 4, 5년 선행을 하게 된다면, 중간에 지치지 않게 잘 격려해주시고, 성취가 크다면, 자만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즐겁게 공부하게 도와주시고, 성취도가 적다면, 선행 속도의 완급을 조절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마도 저랑 여러분들은 아주 많이 늙었을때, 깨달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 아주 열심히 공부시켜서 내 자녀야, 네가 이렇게 평균 이상의 삶을 살지 않니"라고 자식한테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주 열심히 공부한 자식의 중년때 행복이 투자한 공부량과 학습 성취도와 아주 큰 양의 상관관계는 딱히 아닐수도 있었다는 것을. 최소한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보다는요..

IP : 150.150.xxx.28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님느의
    '11.12.8 6:53 PM (121.178.xxx.135)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한 역시 왠만한사람은 알수없는,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글이어서 더욱 의미있는것 같네요.

    저 또한 과학고를 나왔고, 수학경시대회 준비, 의대진학 을 했던 사람으로서 돌이켜보면

    중3때, 수업들은건 하나도 생각이 안나고, 미리배운 미분적분을 써먹는다고

    겨우 2차함수 꼭지점 구하는걸 칠판에서 함수미분했던게 생각나네요

    글쓴이의 훌륭하신 글처럼 미리 고등과정 다끝내고 반복하면서 경시대회 준비나 하고있는 애들은 사실 수업

    내용 안들어옵니다. 오히려 준비안하고 내신시험봤다가 어이없게 다 못맞는경우도 있고요


    전 수학경시대회입상 바탕으로 대학갔고, 대학와서도 경시대회, 올림피아드 , 브릿지과외 이런것만 했는데

    딱봐도 실력없이 의욕만 앞서거나, 부모의 바람으로 억지로 하는애들도 많이 봤습니다


    글중에 공감가는게 , 진짜 자기가 어려운문제에 대한 갈망이 크고 좋아하고 이러면 할수있는데까지 한없이 시키셔도 됩니다

    예를들면 중1정도면 고등학교과정은 잘하면 끝낼수있으니, 정수론이라든가 해석학같은걸 시켜볼수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런게 아니라면 그냥 1년정도의 예습이 젤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자식능력에대한 정확한판단이 중요하고 그에 따른 기대치 설정이 핵심인것 같습니다

  • 2.
    '11.12.8 7:04 PM (61.38.xxx.182)

    선행해서 3-4년걸 미리알수있는 아이가 몇이나 되겠어요?
    선행해서 수업이 시시하다는건 상위권 아이들한테는 해당될수 있어도,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수업내용을 못따라가기때문에 선행이 필요한거..절대 한가지 결론은 없어요.
    사실 학교수업내용이 어려워져서 선행해야 하는 하위권 아이들은 심화는 몇배 더 열심히 해야하는데 왜 그걸모르지...--애 수준 생각않고, 선행에 올인해서 돈낭비 시간낭비하면서 애잡진 마셨으면.--;;

  • 3. ㅇㅇ
    '11.12.8 7:51 PM (183.101.xxx.81)

    아~~주 공감가는 글이네요~ 아이의 학습능력을 보는 객관적인 눈이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 눈이 틀렸으면 좋겠다는 주관적인 안타까움이 있지요. ㅎㅎㅎㅎ
    자식을 바라볼때는 부모의 욕심이란 게 항상 개입하기 때문에,
    정~말 마음을 잘 다스려서 부모노릇을 해야되더라구요.

    아이가 달성할 수 있을 만한 목표를 세우고,
    그를 향해 정진할 수 있게 희망을 주고 지지를 주는 것도 부모의 몫이고,
    너~무 능력이상으로 본인을 괴롭히지 않게 적당한 정도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도
    부모의 몫이죠.
    그 fine line을 찾는 게....항상 딜레마죠.
    부모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이상적인 부모노릇이 요구하는 균형을 항상 유지하는 게 쉽진 않더라구요.
    부모가 해야하는 역할, 적절한 modulator 맞습니다~ 님 글에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 4. 뮤즈
    '11.12.8 9:15 PM (14.47.xxx.110)

    영재고 맘으로서 공감갑니다.
    늘 행복 하세요~

  • 5. ....
    '11.12.9 9:36 AM (163.152.xxx.48)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 6. 프라그
    '12.7.18 5:53 AM (89.176.xxx.10)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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