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봄.
17세의 아직 어린 청년은 집안의 종손이자 한 분 뿐인 형을 대신하여 징용에 끌려갔습니다.
바다 밑 큐유슈우 탄광에서 3년 동안 목숨을 건 광부생활을 하다가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조부님과 집안의 반일 행적으로 끝 없는 탄압과 재산 수탈, 족보에 덧대어 써내려진 친족들의 같은 날짜 사망기록...
바로 제 선친입니다.
살아오시면서 저는 선친으로부터 단 한마디의 일본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쟁 고아들을 모아서 보육원을 여시는 등 먼저 행동으로 본을 보이셨던 분인지라 제게는 삶의 기준이셨습니다.
정치적인 성향도 그 서슬퍼렇던 70년대에 DJ를 좋아하셨었지요.
또한 각 개인들의 요구와 희생,호소에 그치지않고 연합체를 만들었는데 마을금고, 협동조합. 공익복지재단 등등.
그 복지재단은 70년대 초에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하셨고 내년이면 설립 60주년이 됩니다.
물론 자식들에게는 단 한 푼의 재단 지분도 남기시지않고 공익화하셨죠.
선친 자랑이 아니라 저는 몸소실천하신 그 삶에 대해 한없이 그리고 기리면서 살고자하는데
오늘. 바로 FTA가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아는분과 통화를 하면서 나온 말이 "이제 각 자 독자생존하는 길만 남았구만!!" 제가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하고나니 씁쓸하더군요.
제 선친께서는 그 옛날 일본의 침탈과 늑욕의 시간을 보내시면서도 개인보다는 주변에 아픔에 함께했고 또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시며 살아가셨는데 오늘의 저는 뭡니까? 이게.....
80년대 독재와 자유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싸웠던 그 시대 울분들과 함께했던 세대.
87년 자유와 민주주의의 승리가 필연이었던 그 때 또 다시 좌절해야만했던 세대.
수 많은 열사들의 피값이었던 지난 참여정부때와 국민의 정부에서 누렸던 자유..민주주의...
그런 세대의 일원이라 나름 자부했던 지난날이었는데 아직도 한 참 모자랍니다.
정말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으로도 부족하고 자식들과 같이 들었던 촛불로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찌한단말입니까??
오호! 통재라!!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나라를 물려준단말입니까??
100년전 을사늑약을 겪으신 선조들의 아픔이 역사책속의 퀘퀘한 묵향으로만 그치지않고 오늘의 우리 심장속에 흐르는듯합니다.
앞으로 더 힘든 날이 더 많아지겠지요?
더욱 절치부심하고 함께 울어야겠습니다.
서로 격려해야겠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할 것인지 찾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