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전 국무장관의 사실왜곡과 편견
- 회고록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일방적인 기억과 인상만으로 평가
박선원(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현 한국미래발전연구원 부원장)
▲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호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2007년 9월 7일)
콘돌리사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뭐라 잘라 말하기 힘든” 지도자라고 평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중요한 한미 고위급 회담에 거의 참석했던 입장에서 보면 라이스 전 장관이 한편으론 사실을 잘못 알고 있고, 다른 한편으론 편견이 있는 것 같다.
백악관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미국측 통역의 실수
우선 라이스 전 장관은 2007년 9월 8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북핵문제 해결과정에서 한반도에 영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문제는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2006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가진 한·미정상회담의 논의를 상기시켰다.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발맞추어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며 한반도에서 전쟁 종식을 선언하는 평화협정에 부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김정일 위원장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서명할 수 있다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부각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그와 같은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했다. “한국전쟁을 평화조약을 통해서 종결시켜야 한다”며 자신의 입장을 더욱 구체적으로 재확인했다. 노 대통령은 회담을 마치고 기자들이 들어오면 그와 같은 입장을 확인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부시 대통령도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면서 기자들을 모두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안보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We can achieve a new security arrangement in the Korean Peninsula)”라고 말했다. 그런데 미국측 통역사가 “새로운 안보체제”라는 말을 빠뜨렸다.
노 대통령으로선 한·미정상회담에서 논의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누락된 셈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해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 부시 대통령이 일시 당황스러워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평화협정(peace treaty)”이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회담에서 논의된 사항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라이스 전 장관의 회고처럼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의 요청에 대해 당혹스러워 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측 통역의 실수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는 것은 당시 백악관에서 홈페이지에 올린 보도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 내용이다. 그럼에도 라이스는 "노 대통령은 외견상으로는 그 상황이 얼마나 기이한 상황이었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것은 매우 무례한 폄하 발언이다. 노 대통령은 그 발언이 한반도의 장래에 미칠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또 중시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늘을 걷어내고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으로 이르는 로드맵을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일방주의자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확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은 미·중관계를 언급하면 안 되나
다음으로 라이스 전 장관은 한국을 방문해서 노 대통령을 만났는데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균형자로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하며 강의를 하는 등 반미적 모습을 시사하는 발언을 때때로 했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완전한 사실왜곡이다. 라이스는 2004년 7월 9일 부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자격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 자리에서 북핵문제 해결방향, 한·중관계, 동북아의 장래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당시 대화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노무현 대통령 : “지금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중국의 성장에 대해 앞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세계경제와 국제정치, 그리고 북핵 6자회담에서 중국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한·중관계도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관계의 발전 속도나 깊이는 미국과 중국이 앞으로 어떠한 관계를 설정할 지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미·중관계가 한·중관계의 중요한 변수이다. 다자협력에 있어서 미국이 동북아는 물론 전세계의 균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 : “한국 내에는 2가지 관점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이 미국과 완벽하게 일치해서 북한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것과 남북이 협력하고,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과 진보적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둘 다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숙한 관계란 한·미 양국이 항상 모든 문제에 대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이 신뢰를 바탕으로 항상 솔직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관계이다. 중국의 성장과 역할 증대에 대해 부정적인 세력(negative power)이 아닌 긍정적인 세력(positive power)으로 가는 게 중요하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지금까지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북핵문제를 해결한 뒤에도 앞으로 한·중·일 사이에는 해결할 문제들이 많아서 미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날 노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의 면담은 허심탄회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그럼에도 이같은 대화를 기초로 노 대통령이 ‘반미’였다는 느낌을 가졌다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래와 같이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통령이 감히 미·중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 자체가 탐탁치 않았거나 미·중관계가 좋게 발전하기를 희망하는 노 대통령의 바람이 유일 초강국을 힘으로 유지하겠다는 라이스 전 장관의 일방주의 사고에 뭔가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봤을 때 라이스 전 장관이 자신의 회고록을 쓸 때 단지 일방적인 기억에만 의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느낌과 인상만을 기초로 동맹국 지도자를 폄하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