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동지들에게는 카페나 카톡을 통해 소식을 알렸습니다만 푼수를 떨겠습니다.
"이 '용'은 지난 추석 '할배'가 됐음을 신고합니다."
지난 3월 5일 수서성당에서 배추머리 김인국신부님의 주례로 촛불시민들의 축하 속에 큰아들의 결혼식을 치루었습니다.
큰애의 자라온 환경은 읽으신 분이 계실테고.....
아마 에미에게는 진작 뱃속에 애를 가졌다는 얘길했는데 제가 집에 없기를 밥 먹듯해서 인지..
어느 날 애들이 집에 와 밥을 먹다가 아들놈이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말을 하면서
아빠도 손주를 보려면....어쩌구 저쩌구 주절주절 대길 래 그때야 알았습니다,
780924 큰놈의 주민번호 앞자리입니다.
그런데 해산 일이 9월25일이랍니다.
손가락으로 꼽아 봤습니다.
3개월?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그래 하루만 빨리 나오면 부자간에 생일이 같아서 비용도 절감하고 얼마나 좋겠니?
그래 아기 많이 나면 애국하는 거니까 더 낳거라.
또 뭐라 했더라?
그사이 집에는 거의 매주 왔지만 공사다망(?)한 시애비의 얼굴은 보기 힘들었습니다.
큰애 장가보내면 당신 갈 길로 가던가 아니면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던가 결정을 내라고 하기를 4개월째였고
당신하고는 같이 살기가 싫다는 아내의 푸념으로 우선 주민등록을 파갔습니다.
어쨋든 손자를 본 후에 '하마트러면 큰일이 날 뻔 했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제 며느리의 대모이며 우리내외가 8년전에 시신기증을 하게끔 정신적으로 많은 보탬을 주었던,
남편은 이주일과 같은 병으로 같은 병원에서 이주일보다 2개월인가 일찍 세상을 뜨신,
집값이 오르기 전 은마아파트에서 수년간 같은 성당을 다니며 살았던,
조금 여유가 있는 자매님이 비용 걱정말고 성지순례를 같이 가자는 초대를 했지만...
무일푼의 남편을 보고,
또 30여년전 저의 두 아이가 태어날 때 제 어머니는 두번씩이나 캐나다에 있는
비슷한 또래의 외손자를 보기 위해 한국에 안 계셨던 것이 맘이 무척 상했었습니다.
어머니는 4년반전에 돌아가셨지만 저도 서운했던 마음을 어머니께 말씀드렸지요.
제 형제들중에 자식이라고는 딸들만 있고 저만 아들이 둘인 죄(?)로 모든 제사, 명절, 생신등은 제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또 땅 한평 없는 집안에 천주교 묘지에 모신 것도 제 아내의 주장이었습니다.
아무튼 추석 전전날 곽노현 석방을 위한 대한문 앞에서의 촛불집회를 하면서 견찰과 수차례의 충돌과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쌍욕을 견찰 면전에 퍼붓고 들어와 다음날인 일요일, 성당을 가려는 아내에게
추석 당일은 서울북부에 비가 올 줄 모르니 비가 안 올 때 다녀오자고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아내가 성당을 다녀 온 후 10시20분경에 만삭이 된 며느리를 데리고 동대문구 장안동에서 출발하여
부모님 성묘를 다녀왔습니다. 2시간 40분만에 한탕을 뛰었습니다.
점심, 저녁을 먹이고 아내와 큰놈은 앞서고 저와 배불뚝이 며느리는 뒤에 쳐져 중랑천을 걸으며
한번도 안 했던 집 이야기와 큰놈 자라날 때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집에 들어와
"이제는 네집에 가서 편히들 자거라" 이야기 했지만 안방에서 아내와 수근수근대는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서 막 잠이 들었는데 어수선한 소리에 깨어보니 아내는 옷을 입었고 큰놈은 모자를 쓴채 가방을 들었고.....
시계를 보니 12시 40분, 산끼가 있어서 병원으로 간다는군요.
나도 무식한 게 애들이 병원을 간다고 해서 가까운 고대병원이나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가는줄 알았습니다.
큰 놈, 둘째 놈 날 때 병원을 못갔습니다.
큰 놈 날 때에는 입사한지 10개월 차인데 회사 야유회의 모든 준비를 제가 했었고
장모님이 "이 사람아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바깥 일에 충실해야지 집일에 신경쓰면 안되네"라는 말씀에
그 당시 혜화동 로타리에 있던 고대병원으로 아내와 장모님을 보내고 저는 아침에 산으로 가서 애가 태어난 지
열시간이 넘어 등산복차림으로 얼굴이 불그스레 해 갖고 먼 친척이 다른 집 아이를 들여다 보듯 했습니다.
그 후 아이가 자다가 보채면 아내가 깰까 봐 얼른 안고, 또 뉘이면 또 울고,
그러다 보니 앉아서는 안되고 일어서서 흔들어 주어야 잠을 자는 버릇(손자놈도 비슷함)을 갖게 한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그것으로라도 만회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1980년 둘째 놈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이야기는 손자 얘기로
아침에 일어나 "어떻냐? 고대병원이냐? 한대병원이냐?"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몇 달만에 화초에 물을 주고 있으니까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분당에 있는 다니던 병원에 입원을 했고 곧 분만실로 가야 한댄다.
나 혼자 생각에는 배가 아파서 갔다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분만실?
그럼 보름을 먼저 나온다?
그럼 모자라는 거 아냐?
애는 손가락 발가락이 제대로 있을까?
잠시 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애가 통증이 왔가 갔다가 하니까 오늘 중에는 나올 것 같다며 추석 차례상에 올릴 토란국이 상할지 모르니
까스불에 국을 팔팔 끓이고.....
성당에 꼭 가서 미사를 드리고 분향을 하고 한잔 올리고 오란다.
(천주교회에서는 몇년전부터 명절에는 먼저 가신 조상을 위해 차례상을 차리고 분향과 헌주를 하고 있다)
몇 달만에 돈 이야기가 아닌 아주 쉬운 부탁을 들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제인가 했던 청소도 또 했다.
성당을 가니 몇번인가 뵀던 신부님이 마치 내 속을 꿰뚫고 있듯이 맞아 주신다.
기도를 부탁드리고 성당에서 돌아와 산통을 느끼고 있는 애에게 시애비가 먼저 가는 것도 그렇고하여
간단히 찬밥에 국을 말아먹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아! 손자가 생후 첨으로 할애비를 만나는 날이지?
어제 샤워는 했지만 새 마음으로 또 샤워를 했다.
애들 결혼식때 입었던 양복에 낵타이를 맸다.
양치질도 또 한번 했다.
아침에 혈압약을 먹었지만 또 먹었다.
손에서 담배 냄새 날까 또 비누질를 했다.
가다가 틀림없이 담배를 피울텐데 왜 했는지 모르겠다.
1시 정각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12시 46분에 순산을 했단다.
지하철 안에서 할애비가 됐다고 카톡을 하며 가니 시간이 언제 갔는지 모를 정도로
병원에 도착하여 며느리 손을 잡아 주었다. 고생했다. 그리고 또 고생했다.
애는 어떠냐고, 손가락, 발가락 등 묻질 못했다.
조금 전에 분만을 지키던 안사돈이 신생아실에서 면회를 하고 갔고
5시쯤에는 애를 오래 볼 수 있다는 이야기(큰놈, 작은놈 날 때에는 애를 보려면 신생아실 간호원 눈치를 봤는)에
병원 안팍을 드나들며 담배피고 물양치를 하고 들어오길 수차례, 드디어 침대에 누운 손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들 어릴 때 하고 정말 똑 같다. 차이는 아들은 1주일을 늦게 났고 손주는 2주일을 빨리 태어났기 때문에
큰놈은 머리가 길고 숱도 많았는데 손자는 반대다.
이놈도 분명히 20대 후반에는 조짐이 보일 놈이다.(집안이 대대로 머리가 벗겨졌음)
그런데 신생아들은 얼굴에 주름도 있고 그러든데 요놈은 이렇게 뺀질이야?
서너달 전인가 할아버지가 손자 이름을 짓는 게 좋다는 아내의 잔소리에
명진스님(전 봉은사 주지스님)께 삼성의 이건희, 그형 이맹희를 빼고 작명을 해주십사 어렵게 부탁을 드렸다.
손자의 출산 소식과 함께 많은 사연의 문자와 사진을 스님께 올리니
곧 바로 축하한다는 전화를 주셨다
한달전 월악산 법회에서 봉투에 주신 이름이다. 이웅희(李雄熙)
오래 전부터 여의도 미사를 주관하고 계신 김인국신부님께는 출산 소식과 유아영세 부탁 말씀을 문자를 드렸다.
첨 알았습니다. 분유값이 3만원이라는군요.
삼년 반을 길에 있으면서 가장노릇을 못했는데 짬짬이 손자 우유값이라도 벌려고 가방을 매고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