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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생명의 은인

| 조회수 : 1,803 | 추천수 : 158
작성일 : 2009-09-11 21:58:43
둘째 아이의 태몽은 커다란 곰이 나를 쫓아 오다가 집채 만한 호랑이로 변하여 달려드는 꿈이었다. 아무래도 임신인 것같아 산부인과에 가서 여러 검사를 하던 중 자궁암 초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를 임신하게 되어 너무 기쁘기만 했는데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된 나는 그저 혼란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의사는 조직 검사 후 경과를 보고 만일의 경우 아기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주 초기였기 때문에 생명에 지장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약물치료가 필요할 경우 태아에게 지장이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 치료를 시작해도 무방할 정도로 병의 진행이 빠르지 않을 것으로 진단이 되어서 둘째는 무사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엄마가 빨리 치료를 받게 해주려고 그랬는지 아이는 3주 일찍 태어났다. 일찍 태어난 탓에 체온 조절이 잘 안되어 태어나자 마자 적외선을 쪼이게 하기 위하여 옮겨진 아이를 보니 한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내가 임신기간 내내 걱정이 많아서 빨리 태어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출산 후 8개월이 지난 후 치료를 위해 대수술이 있었는데  돌도 채 안된 아이를 두고 수술실로 들어가며 마취로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아마도 내가 다시 이 아이를 볼 수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턱없는 걱정이 앞섰었던 것같다. 수술은 아무 무리 없이 잘 이루어졌고 한없이 작고 연약하기만 했던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나 집에 돌아 올 때 나는 늘 아이를 한동안 꼭 끌어안고 잠시 있는 일을 즐긴다. 나의 심장과 아이의 작고 갸녀린 심장이 맞대어 있는 그 순간에는 잘려 나간 탯줄과 관계없이 우리가 다시 하나로 이어짐을 느낀다. 가끔씩 나는 둘째를 꼭 안아주면서 "너는 엄마 생명의 은인이야" 라고 말해 준다. 그 아이가 생겨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의 병을 모르고 지냈을지 알 수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전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제 딴에도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언니와 동생들에게뿐만 아니라 학교 친구들에게도 자기는 더 많이 아플 수도 있었던 엄마에게 빨리 병원에 가 보라고 알리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엄마 생명의 은인이라고 자랑을 하곤 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누군가에게 깊이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이렇게 기쁜 일인가 보다. 철부지 엄마를 어른이 되고 여자로 만들어 준 언니처럼 자기도 엄마의 인생에 큰 의미를 지닌 아이라는 사실이 우리 둘째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것이 더 많기 마련이다. 아이 넷 중에서 동생과의 나이 터울이 가장 적은 아이가 둘째라서 나는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둘째의 돌이 막 지나면서 세째의 입덧이 시작되서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했고 일하는 엄마였기에 늘 바쁘기만 했던 것도 마음에 걸린다. 22개월 차이의 세째가 태어났을 때 둘째는 미처 말도 제대로 못했을 때였는데 세째를 데리고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자기가 언니가 되었다는 게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제는 다들 많이 자라서 함께 어우러지며 지내는 모습을 보면 그 모든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아이 넷을 낳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고 아이들 모두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가 내 인생에 찾아온 지 8년 동안 우리는 참 많은 일들을 함께 이루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뒤집고 기어 다니고 일어 서고 걷기 시작하는 모든 발육이 다른 아이들보다 늦었고 만 세살이 넘도록 말문이 트이지 않아 가슴을 졸였던 시기도 있었고 혹시나 내가 병때문에 근심이 많아서 그런가 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청산유수로 말을 시작하고 영어가 모국어인 부모 밑에서 자란 친구들보다도 훨씬 빨리 독학(?)으로 글을 깨쳐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남편과 나는 그간의 걱정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늦되는 아이였던 둘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책벌레로 자라서 집안의 책이란 책은 다 읽고 있는데 오늘은 엄마 방 화장실에 놓여 있는 프로이드의 책을 읽고 있다가 혼이 났다. 다소 선정적일 수도 있는 책이기에 "너는 아이니까 어른 책은 어른이 된 다음에 읽어야 한다"고 했더니 엄마가 좋아하는 책이라서 자기도 읽은 거라는 엉뚱한 녀석이다. 초둥학교 때부터도 독서 폭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넓어서 만화에서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손에 닫는 것은 모조리 읽어내곤 했다.

하루는 뜬금없이 자기는 UC Davis 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하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수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우리가 살던 캘리포니아에서는 UC Davis 에만 수의과 대학이 있다). 그 학교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으니 미국에 있을 때 학교 선생님에게 수의사가 되려면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지를 물어서 여러 학교 이름을 듣게 되었는데 UC Davis 가 그 중 가장 학비가 싼 주립이라서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동생과 장난감을 가지고 싸울 때에는 동생보다 더 어리게 굴 때도 있는 아이가 제 나름대로 진로를 정하고 학교까지 비교를 했다는 소리를 하니 대견하기도 하고 갑자기 훌쩍 커버린 것만 같아서 가슴이 뭉클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건강을 지켜 준 아이가 이제는 아픈 동물들을 보살피기 위해 수의사가 되려고 하고 게다가 아이 많은 엄마 아빠의 주머니를 생각해서 학비 생각도 했다니 나는 아이가 이렇게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가고 싶은 학교라면 엄마는 어디든 좋다고 하니 내가 늘 해주는 것처럼 이번에는 제가 나를 꼭 끌어 안아 준다.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호리
    '09.9.11 10:05 PM

    동경미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지금은 깨끗하게 나으셨겠지요?
    글에 그려진 둘째가 너무 이쁩니다. 궁뎅이 톡톡 ^^

  • 2. 수늬
    '09.9.11 10:20 PM

    그러게요...오늘 뜻하지않게 동경미님 글 대충 다 읽어보면서...
    가슴으로 또 한번 더 읽어보고 반성하고 배웁니다..

  • 3. 동경미
    '09.9.12 4:47 AM

    호리님, 네 건강해졌어요. 우리 둘째 참 속 깊고 착한 아이지요. 둘째 덕에 오늘도 덤으로 삽니다.

    수늬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노릇 너무 힘들지만 보람있는 일이지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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