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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 아름다운 뒷걸음질

| 조회수 : 1,983 | 추천수 : 150
작성일 : 2009-07-31 14:28:53
어려서부터 함께 나눠 온 교환 일기가 큰 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뜸해지기 시작했다. 할 얘기가 적어지는 것도 아이들에 성장에 따라오는 당연한 이유이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부족한 것도 큰 이유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정말 요즘같아서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따금씩 아쉬운 생각에 얼마 전 예쁜 노트가 눈에 들어오기에 한 권씩 사서 나누어주었다. 자주가 아니더라도 한번씩 써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지난 주 어느 날, 둘째가 내 책상 한쪽 귀퉁이에 보일락 말락 교환일기를 갖다 놓은 것이 보였다. 얼마만에 받아보는 것인지 반가워서 얼른 펴보았다. 의례적인 서두에 뒤아어 주저하며 쓴 기색이 역력한 아이의 글의 내용은 자신이 지난 학기의 수학 과정 학년말 고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고백이었다. 5월 말에 이미 결과를 알았지만 엄마가 실망할까봐 말하지 못한 채로 방학을 맞이했고 더는 숨길 수가 없어서 이렇게 글로 알린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뛰고 혈압이 상승했다. 당장에라도 불러서 야단을 따끔하게 쳐주고 싶었지만 우선 심호흡부터 했다. 그리고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지금 왜 화가 나는가? 아이의 성적 때문에?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아이의 태도 때문에? 다음 학년에 영향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애써 숨을 가라앉히며 생각을 정리하니 그 무엇보다도 아이가 가장 고민하고 어려울 때 그 즉시로 내게 달려오지 못했다는 것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부실함때문이라는 생각에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었다. 아이가 두어 달을 고민 속에서 끙끙거릴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나. 내 딴에는 아이와 가깝다고 자부했는데 나와 아이의 실제 거리는 그렇지 않았던 걸까. 자책감과 실패감에 쓰린 가슴을 안고 아이를 불렀다.

"은선아, 왜 진작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어? 그랬으면 야단을 맞긴 했겠지만 두 달 동안 엄마 아빠 눈치 살피며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됐잖아? 엄마가 그렇게 멀게 느껴졌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아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아무리 이성적이 되려고 해도 아이가 조금만 제 길에서 벗어나면 왜 어김없이 내가 스스로 놓는 죄책감의 덫에 빠지는 걸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또 나의 삶을 슬라이드처럼 되돌아본다. 일 한답시고, 학교 준비한답시고, 관심을 충분히 쏟아주지 못했을까, 둘째라서 위로 아래로 치여서 그럴까, 나와 기질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아이를 제대로 공감해주지 못하고 살고 있는 걸까...한 무더기의 자책이 피할 수 없도록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같다.
"엄마가 학기 중간에 몇 가지를 지적해주시면서 고치지 않으면 학년 말에 크게 후회할테니까 개선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질 않았어요. 내 식 대로 해도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는데...정말로 엄마 말이 맞았어요. 그렇게 보내서는 안되었던 거란 걸 알았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밉기도 해서 말을 못했어요."

처음으로 자아가 공격을 받아 한 조각이 부스러져 나간 아이는 제 설움에 한참을 울었다. 누군가가 해주는 조언이 자존심을 건드리고 그 때문에 그 말을 무시하며 내 방식을 고집했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의 그 황망함과 좌절감을 내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고 있었음을 나는 몰랐던 거다.
"은선아, 그래서 네가 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아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채 나를 본다.
"엄마는 지금 네가 7학년 때 이 기분을 맛볼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지 몰라. 이 경험을 만일 40이 넘고 50이 넘어서 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얼마나 뒤늦은 거니? 널 도와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고 말이야. 지금 네가 7학년에 이렇게 큰 실패감을 맛보는 거니까 엄마 아빠도 널 도와줄 수 있고 선생님도 있고 얼마나 다행이니? 만일 이번에 네 방법 대로 하니까 어찌 어찌 그냥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면 넌 앞으로도 계속 요령을 터득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굳어졌을거야. 어른이 될 때까지 말야. 단, 엄마가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은선이가 그동안 그렇게 고민할 때 엄마한테 당장에 달려오지 못했다는 거였는데, 그것도 우리 은선이가 어른이 되어가느라고 하나씩 자라가는 과정으로 이해할께."
크게 야단을 맞고 소란이 날 걸로 각오했던 아이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안도를 하는 눈치였다.  

지난 봄 7학년이 중간쯤 가고 있을 때 6학년 때부터 월반을 해서 공부하는 수학을 어려워하기에 너무 어려우면 원래의 반으로 다시 가서 정상적으로 천전히 가도 된다고 했었다. 아이는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월반을 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엄마는 참 이상하다고 화를 내며 자기는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었다. 그랬는데 이번에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새 학년에는 작년 것을 다시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남보다 한 학년을 앞서 가고 있다는 우쭐함이 있었을텐데 그 마음에도 금이 갔을 것이다. 같이 수학을 공부한 몇 몇 친구들은 시험을 통과해서 계속 앞서가고 있는데 자신은 한 걸음 후진했을 때 느끼는 도퇴감을 아이는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겪어내야 할 것이다. 가족들에게 큰 소리를 쳤었는데 그것도 면구스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긴 인생 여정에서 너무 급히 서둘러 갔을 때에는 반드시 어느 시점에선가 한번 후진할 일이 생긴다는 것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내 눈에는 남보다 두 걸음 앞서 간 것인데 어느 순간 돌아보면 그게 오히려 돌아가는 길이었다는 귀한 교훈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급히 가는 것보다 순리대로 남들과 함께 손잡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나는 월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 넷을 기르면서 감사하게도 공부 때문에 그다지 애를 먹은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천천히 가야한다는 원칙을 믿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공부가 앞선다고 아이의 정서적 성장도 함께 월반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한 학년, 일 년의 세월이 크게 느껴지지만 막상 세상에 나갔을 때는 그깟 일년 이년의 세월을 앞당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앞에 펼쳐지는 수 십년의 세월을 아이가 얼마나 지혜롭게 감당해가는가가 문제가 된다. 학교 때 공부 잘 하던 아이가 좋은 직원,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로 성장하지 못했을 때에는 성적표의 숫자 이상의 부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지인과의 얘기 중에 우리의 자녀 교육의 성공 여부는 아이가 어느 대학을 갔는지, 어느 직장에 취직을 했는지까지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어떤 배우자로 살아가는지, 부모 노릇을 어떻게 감당하는지를 지켜봐야 하는 것이라며 함께 공감했다. 결국 평생 조마조마하며 아이를 지켜보며 언제든지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기 위해 대기조로 살아가는 게 부모인가 보다.  

월반 학생으로서의 프라이드가 한 순간 땅에 떨어진 둘째가 반드시 명예를 되찾겠다던 굳은 맹세도 며칠 만에 잊었는지 수학 문제집을 제쳐놓고 새로 시작한 소설책 삼매경에 빠져서 키득거리고 있다. 잔소리를 하려고 아이 방에 가다가 돌아서기를 여러 번하는 나도, 결심이 흔들리는 아이도, 우리는 모두 한 번에 한 걸음씩 천천히 가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자유게시판에 올렸는데 아무래도 자리를 잘못 찾은 것같아 이곳으로 다시 올립니다^^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09.8.1 11:30 AM

    좋은 글입니다. 저도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아이가 많은 실패와 실수를 경험할수록 더 많은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고 하는데요... 부모의 입장에서는 힘든 계단보다는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태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가는것이 좋겠지요?? 공부보다는 배움이 큰아이로 자라나는것이 제 소망입니다.

  • 2. 어진현민
    '09.8.3 2:28 PM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아이를 대하는 모습도 제가 배울점이네요..

    천천히 가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 3. 82cook
    '09.8.10 8:29 AM

    82cook 관리자입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글이라서 글 제목에 ★표 붙여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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