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나라가 영국 이민영어 인증시험(IELTS)에서 20개 국가 중 19위를 했다는 기사를 읽고 놀랐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미국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토플 응시자를 배출하는 나라 한국의 위상이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영어 한 과목을 위해 한 해 15조원의 사교육비를 쓰고도 국민 영어 능력이 세계에서 최하위권이라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단 한 번의 과외도 없이 순수하게 학교 교육에만 의지하고 있는 독일 학생들의 영어 수준은 어떨까. 독일인에게 영어 공부란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우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만 공부하는 과정은 우리보다 결코 쉽지 않다.
독일은 김나지움 5학년 때부터 영어를 시작한다. 작년부터는 종일반 수업의 시행과 함께 3학년으로 앞당겨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교육은 여전히 5학년부터라 해야 옳다. 우리 아이가 공부하는 김나지움은 소위 한국의 특수목적고와 같은 빌링구알이란 외국어 학교다. 인구 26만 정도의 소도시에 3개의 빌링구알 김나지움이 있다. 이 중 두 곳은 프랑스어 김나지움이고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한 곳이 영어 학교다.
학교 수업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가장 높다. 5학년 시간표를 보면 독일어 수업은 주중 4시간인 반면 영어는 6시간이 배정되어 있다. 또한 7학년이 되면 사회과목중 지리를 영어로 수업하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정치, 역사 등 새로운 영어 과목이 추가된다.
6학년 때 우리 아이의 영어수준은, 이미 일주일에 한 번 독일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영국 선생님의 수업을 받을 정도로 듣기와 회화에 문제가 별로 없었다. 자기소개나 편지, 간단한 의견을 쓰는 데도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물론 6학년 수준의 문법과 어휘 한도 내에서 말이다.
아이가 독일에서 만족한 영어 교육을 받고 있어도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적인 평가에도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같은 또래의 한국 아이들과의 수준차이를 알고 싶어서 궁리하던 중, 모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주관하는 국제영어대회에 독일에서도 참가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영어 성적이 언제나 상위권이기도할 뿐더러 수업시간 수 등을 따져보니 한국 아이들 보다 실력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초등 5,6학년용 기출문제집을 구해 풀어보게 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아이는 처음 시험을 시작할 때부터 아는 단어가 몇 개 없다며 투덜거리기 시작하더니 간신히 100점 만점에 50점 정도의 점수를 받았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점수였다. 아무리 독일학교의 수준이 낮다고 하지만 반에서 그래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아이가 한국에서는 낙제를 면치 못하는 수준이라니. 내 스스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아 아이에게 책을 들려 영어 선생님께 보내 평가를 부탁했다.
며칠 동안 꼼꼼히 읽어 보신 영어 선생님은 한마디로 도대체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문법은 독일에서 영어를 처음 시작하는 5학년 1학기 정도의 수준이고 어휘는 9학년 정도의 수준이라며 놀라워했다. 도대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아이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5.6학년이면 기초 글쓰기와 문법, 회화 등을 위주로 공부해야할 시기인데 독일에서는 10학년이나 되어서 하는 오지 선다형 독해문제를 푼다는 것이 이해 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이 독해문제를 풀 수 있는 학생이 글쓰기와 문법, 회화 등 기초적인 공부를 이미 끝낸 아이들인지 궁금하다고 의아해 했다.
선생님은 오지 선다형 문제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오지 선다형으로는 대략의 수준을 알 수 있을 뿐이지 학생들의 실력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몰라도 정답을 맞힐 확률이 20%니 어떻게 학생의 문제가 무언지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겠느냐는 자신의 생각까지 아이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작문과 회화를 위주로 수업을 하는 독일학교 저학년 영어 교육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제를 보고 선생님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독일은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고 있는 단어 량에 맞추어 텍스트를 쓰는 연습을 한다. 단어를 먼저 많이 외워두고 적절한 어휘를 골라가며 작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열 개의 단어를 배우면 그 단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의견이 들어간 글을 써낼 수 있어야 한다. 논술과 말하기를 중심으로 한 수업이라는 것은 수준만 낮을 뿐이지 독일어와 같다.
한 예로 영어를 시작한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5학년 1학기말 영어시험 문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총 네 문제 중 두 문제는 어휘와 문법에 관한 테스트다. 그리고 3번 문제는 ‘일주일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일에 관해서often,usually,sometimes 등의 부사를 넣어 쓰시오.’, 4번은 ‘그림에 있는 보기 중 3개 이상의 물건을 사려고 한다.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할 때 손님과 점원 사이에 오가는 Dialogue를 쓰시오.’ 등의 질문이다.
김나지움 저학년이기 때문에 1,2번과 같은 문법, 어휘문제가 고루 출제되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독일어와 마찬가지로 3번과 같은 논술 문제의 비중이 점점 많아지다가 8학년 정도가 되면 문법과 어휘 문제는 아예 사라진다. 독일어든 영어든 논술을 못하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 9학년인 우리 아이에게는 친한 미국인 친구가 있다. 자주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자기도 하는 그 친구와 영어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 우리 아이가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을 때가 있다.
단 한 번의 과외도 없이 이렇게 된 것은 수준 높은 학교교육 덕분이다. 독일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번역해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 또한 지리, 정치, 역사 등의 사회과목을 순수하게 영어로 수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김나지움에서 7학년부터 시작되는 영어 사회과목 수업은 모두 이 학교 영어 선생님들이 담당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영어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해와 어휘중심의 수업은 아직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 같다. 영어 교육에 관한 기사를 읽다보면 옛날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성과를 위해서는 지금 시행되고 있는 영어수업의 질과 평가방법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하루 아침에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것이 힘들다면, 각종 영어대회나 학교 이외에서 시행되고 있는 평가시험만이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출제할 수 있다면, 혹은 그러한 시험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영어교육도 서서히 실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출처 : 독일교육 이야기
육아&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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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과외 없는 독일학생들의 영어실력
무터킨더 |
조회수 : 4,236 |
추천수 : 91
작성일 : 2009-04-30 21: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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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도민
'09.4.30 10:31 PM공감이 가네요..
남편이 일에 필요해서 영어공부를 하는거 보면..
기술에 관한 원서책이나 소설책은 뜨문뜨문 잘 독해 하는 편인데..
전화로 하는 회화공부는 땀을 삐질삐질....2. 이미지
'09.4.30 11:56 PM정말 교육프로그램의 문제만일까요? 그것도 크겠지만
독일어와 영어는 한국어와 일본어랑은 비교도 안되게 비슷하죠.
알파벳부터 90%가 같으니까요.
단어는 말할것도 없구요.
한국어 하는 사람이 배우는거랑은 시작이 달라요.
독일 프로그램 그대로 한국에 갖고와서 가르쳐도
한 10배쯤은 늦게 배울껄요. 물론 지금보단 낫겠지만요.
학교때 아주 조금 영어배우신 독일할머니가
그거 안잊어버리고 간단한 문장은 구사하시더군요.
백화점이나 큰 가게의 젊은 점원들 영어는 거의 네이티브 수준이던데요.3. 무터킨더
'09.5.1 1:27 AM이미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일본어 배우는 정도로 쉬운 언어지요.
특히 말하기와 듣기는 거의 연습이 필요없을 정도로 쉬운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과정은 말하기와 듣기 쓰기를 중심으로 합니다.
문법이나 독해, 어휘는 수업시간에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쓰기와 말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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