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요한 수면 밑에 숨은 닌자처럼 눈동자만 열심히 굴리길 몇 년.
고수님들의 내공에 감탄하며 받아적다 보니
저도 생존요리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그냥 인사만 하기는 그렇고
포스팅하기엔 참신한 소재도 없고 내공도 딸려서 침묵하고 있었는데
용기를 내어 고개 내밀어 봅니다.
남편이랑 딸이 면 애호가들인데
주말이면 맵고 진한 국물을 원하는 남편과
아직 매운 걸 못먹는 어린 딸을 동시에 만족시키기는 어려워
항상 국물을 두가지로 준비하곤 했었어요. (왕 귀찮;;)
금요일에 주말 메뉴를 구상하다가 갑자기 떠오른게 탄탄면.
얼큰한듯 하지만 고소한 맛도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어요.
82쿡과 한국의 웹사이트를 뒤졌는데 엥? 의외로 레시피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google에 가서 dan dan mein을 쳐보니 주루룩 나오는데
제가 원하는 맛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 거에요.
탄탄면이 원래 국물 거의 없는 사천식 매운 비빔면인데
저는 일식 라멘집에서 나오는 국물 자작한 스탈을 원했거든요.
이쯤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요리책이 있었으니...
제가 아기 낳기 전에 갑자기 요리신이 내려서;; 누들 요리책을 몇권 샀던 기억이 나서요.
펼쳐봤더니 아니아니, 맨 첫장 레시피가 바로
저자가 일본인이라서
제가 원한 바로 그 중화풍 탄탄면의 맛을 내줄 것 같은 기대감이 고조되었죠.
책에 나온 원 레시피는 다음과 같습니다.
(2인 기준)
-중국식 누들 2인분
-다진 돼지고기 150g, 죽순 데쳐서 60g, 표고버섯 2개, 숙주 1/3봉지, 양파 1/2개, 마늘 2톨, 생강 엄지 손가락 한마디
-산초가루 1~2T, 참기름 1~1.5T, 두반장 0.5~1T, 참깨 페이스트 4T, 라멘 스프 2인분 (간장 or 미소 베이스로 대체 가능)
-고명: 다진 쪽파 (or 조개 관자)
1. 죽순, 표고는 사방 5mm로 다지고, 숙주는 꼬리를 뗀다. 양파, 마늘, 생강도 다져놓는다.
2. 스프 2인분에 포장에 적힌 용량 + 50~100ml의 끓인 물을 부어녹인다.
3. 달군 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두반장을 볶다가 양파, 마늘, 생강을 약불에 볶아 향을 낸다.
4. 강불로 올려 다진 돼지고기를 더해 볶다가 고기가 익으면 버섯, 숙주, 죽순을 더해 볶는다.
5. 숙주가 부드러워지면 참깨 페이스트와 산초가루를 더해 재빨리 저어 향을 낸다.
6. 5에 2의 스프를 추가한다.
7. 면을 삶아 물기 뺀 후 고명 얹고 6의 스프를 부어 서브한다.
저는 냉장고 속 재료만으로 이렇게 바꿨습니다.
-중국식 에그누들 2.5인분 (저희 부부, 아기 먹을 거라)
-양파 1/2개, 새송이 버섯 1개 (돼지고기, 죽순, 숙주, 표고 없어서 생략)
-(산초가루 없어서 생략) 참기름 1~1.5T, 두반장 0.5~1T, 참깨 페이스트 대신 땅콩버터 4T,
인스턴트 미소국 3인분(+물 500ml), 배합초 3T
-고명 : 새우, 관자, 청경채, 계란, 다진 대파
*해 보니 tip
1. 돼지고기, 숙주는 꼭 있어야 필수재료에 가까워요. 있었으면 더 맛있었을 것 같아요.
2. 산초가루도 필수재료라는데 저는 접해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맛일지. 없어도 맛은 그럭저럭 났어요.
3. 구글 검색결과를 따라 참깨 페이스트 대신 땅콩버터로 대체했습니다. 같은 맛이래요.
4. 저는 국물 자작한 걸 원해서 인스턴트 미소 페이스트 3인분을 물 500ml에 풀었어도 좀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물 양을 좀더 늘려도 괜찮을 것 같아요. 간은 충분히 진해요.
미소 없으시면 맹물 혹은 닭육수에 진간장 + 국간장 풀어서 쓰시면 될 것 같아요.
5. 마지막에 국물 간 보시고 식초 추가 여부를 결정하셔요.
저는 단맛과 톡 쏘는 맛이 부족한 듯 하여 한큐에 해결코자 배합초;;를 넣었어요.
단맛은 됐지만 좀 밍밍한데 싶으시면 그냥 현미식초 넣으시면 될 것 같아요.
서양 레시피에도 대부분 식초를 넣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6. 면은 생라면 쓰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이런 걸 전에 해본 적이 없어서 과정샷은 생각도 못 했고요.
상차림도 제대로 못 찍었어요.
먹고 나니 맛이 괜찮네? 한번 공유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지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딸이 한입 먹은 그릇이나마 찍었습니다.
비루한 비주얼에 에계? 겨우 이거야? 하시면 어떡하죠?
그래도 맛은 면 매니아 남편이 엄지 척! 해줬으니 한번 믿어주세요 ㅠㅠ
저희 부부가 딸 낮잠 자는 동안 먼저 먹어 버려서 국물이 부족했던 데다
아기 먹기 편하라고 넓은 파스타 그릇에 담았더니 정말 국물이 바닥에 깔린 수준이네요.
입구 좁은 면기에 담으면 그래도 2.5인이 먹기 괜찮은 용량이긴 해요.
그리고 저녁에는 니나83님의 스테이크를 저도 도전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엄지 척 x 1000000! 정말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고기 굽는 팁이 너무나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사진에 보여주신 색깔만큼 구워야 되는 줄 여태 몰랐거든요.
항상 얇은 고기만 사다보니 속까지 익어버릴까봐 걱정돼서
표면에 갈색이 나자마자 뒤집었는데 그러면 꼭 육즙이 흘러나왔거든요 ㅠㅠ
그런데 이번엔 팬을 센불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뜨겁게 달군 후
고기 얹고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익혔습니다.
대신 양면을 진하게 구운 다음 바로 불에서 내려서 레스팅 시켰어요.
얇으니까 약불에서 안까지 굽는 단계는 생략.
그랬더니 겉은 불맛도 나면서 바삭바삭하고요,
안은 육즙이 풍부하게 돌면서 부들부들한 맛있는 스테이크가 되었어요.
삐쩍 마른 thin cut 스테이크로도 이런 맛이 가능하다니 신기하네요.
역시나 형광등 아래에서 찍은 비루한 사진 나갑니다 ㅠㅠ
냉장고에 마땅한 가니쉬 거리가 없어서 청경채 데쳐 깔았고요.
샐러드 거리도 없어서 스테이크에 얹을 소스를 두배로 만들어서
생 토마토 슬라이스한 거에 끼얹어 줬습니다.
이렇게 차려서 남편이 출장길에 들고온 와인이랑 맛있게 먹었습니다.
에피소드 하나,
남편이 싱가폴 출장 가는 길에 와인 한병을 사들고 갔어요.
일 끝나고 호텔방에서 먹을 생각이었지만 일정이 너무 바빠 먹을 틈이 없어서
결국 다시 캐리어(기내 반입 사이즈)에 도로 넣어서 들고 온 거죠.
아니나다를까 검색대에 걸렸는데
융통성 없기로 소문난 싱가폴 공무원이니 남편은 그냥 알아서 버리라고 했대요.
그런데 여기서 반전,
담당 여직원이 자기가 술 좋아해서 안타까워서 그러는데 이거 참 좋은 술이다,
버리기 너무 아깝지 않냐, 집에 가서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며 끌고 가더래요.
남편은 로보트처럼 그녀가 시키는 대로 공항 약국에 가서 100ml 용기를 사왔고
검색대 앞에서 둘이서 용기 7개에 열심히 소분해서 캐리어에 넣었답니다.
그 여직원 왈, 지난 주에는 한 영국인의 800ml 리쿼를 무사 반입시켰다며 ㅋㅋ
덕분에 맛있는 와인을 마셔서 좋긴 했는데
약통 하나씩 와인잔에 따라 마시니 영 떳떳하지 못한 기분;;
참, 저희 딸 비상반찬 '불 안 쓰는' 장조림 레시피 알려주신 Carmen님 감사드려요.
그리고 제가 항상 만들어놓고 쓰는 맛간장 레시피 알려주신 Little Star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넣고 맛간장:맹물 = 1:1 비율로 붓습니다.
그리고 두 번은 재활용해요 ㅋㅋ
'불 안 쓰는' 초절임 레시피 알려주신 J-mom님께도 감사드려요.
물:설탕:식초:소금 = 6:6:6:1 - 황금비율입니다! 제가 외우는 몇 안 되는 레시피에요.
피클 국물 끓이는 것도 해봤는데 그냥 섞어서 붓는 이 레시피로도 충분히 맛 들어요.
저는 무 채썰어서 이 양념국물에 재웠다가 비빔냉면이나 비빔밥 고명으로 내구요.
보통은 오이와 무를 얇게 썰어 하룻밤 상온에 재워뒀다가 냉장보관해 먹습니다.
제가 더운 동네 살아서 그런지 바로 다음날 먹어도 맛 잘 배어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불 안 쓰는' 제 육수내는 방법.
큰 통에 다시마, 국멸치, 표고버섯 넣고 그냥 물 부어서 하룻밤 상온에 우렸다가
냉장보관해서 국물요리나 덮밥소스에 씁니다.
푹푹 끓인 육수만큼 깊은 맛은 안 나지만 귀차니스트로서는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참, 혹시 이 정보 유용할까요?
좌측의 인스턴트 미소 페이스트는 많이들 쓰실 것 같은데
우측의 진저 페이스트 알려 드리려구요.
생강을 강판에 갈아놓은 질감이어요.
개봉 후 냉장보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튜브로 쭉 짜서 쓰면 되니 편해요.
생강 한덩이 사면 너무 커서 말라 버리기 일쑤고,
얇게 썰어 냉동해서 쓰자니 일이 너무 귀찮은 거에요.
어느날 일본인 친구 덕에 써보고 앗, 이런 신세계가! 했지요.
요샌 원전사고 이후로 살짝 마음이 무겁긴 한데요.
전 메인 식자재 아닌 이런 소량의 제품은 편의에 따라 그냥 쓰는 편이라서요.
(너무 야단치지 말아 주셔요 ㅠㅠ)
제 한계치는 마늘/대파 다지기까지라서 생강은 이걸 사서 쓴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