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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게오르규 & 나 무등산에 가다(상)

| 조회수 : 1,875 | 추천수 : 1
작성일 : 2012-05-05 16:05:15

 

무등산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스토리텔링이 풍성하다.

1975년엔  루이제 린저가 무등산에 갔다.

'25시'의  게오르규는 두번이나.

의병장 제봉 고경명은 임진왜란 일어나기 20년 전 무등산을 오르고는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썼다.

육당 최남선은 1925년 '무등 산상의 무등등관(無等等觀)'을 썼다,,,, 심춘순례에 실린 그거.

13년 동안 서신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은 퇴계 탈상이 있던 날 무등산 규봉에 올랐다,,,그리고 추모시를.

하서 김인후,송강 정철,면앙정 송순,고봉 기대승,제봉 고경명,임억령,양산보는 가단(歌檀)을 결성하고는

아예 무등산 자락에 집짓고들 살았다.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은 무등산에서 나고 자라고 묻혔다.

고경명이  출사표 '마상격문(馬上檄文)'을 떨치고 출진한 곳도 무등산이였다.

김삿갓은 화순 적벽 가는 길 무등산 장불재를 넘었다,,,그리고 '무등산'이란 시를.

해방후 의재 허백련은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사랑방을 차렸다.

사랑방 '춘설헌'엔 최남선,이은상,김철호,서정주,함석헌,고은이 들락날락했다. 

독일서 파리서 루이제 린저,게오르규도 1970년대 중반 춘설헌을 찾았다.

인상파 화풍을 토착화시킨 오지호(吳之湖,1905~1982)도 생 마지막 20년간 무등산 자락 지산동서 초가를 짓고 살았다.

두번째 무등산~~

이후 한동안 무등산 내면에 빠졌다. 글이 길어진  이유들이다.

증심사 계곡 초입 문빈정사 앞~~ 오후 1시경인데 벌써들 내려오고.

두번째로 17년만에 무등산엘 간다. 설레는 이 느낌이란.

 

최남선이 1925년 심춘순례서 그랬지.

/전체로는 그리 신통한 것을 모르겠어도 상봉에 가서는 꽤 재미를 내노라 한 것이 무등산이다/

그러나 정상 인근 입석대에 이르러서는,

/조화의 장난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배포가 숭엄 장대(崇嚴壯大)하다. 하느님의 이궁(離宮) 자리다/

노산 이은상은 무등산에서 해금강을 보았는데,

/금강산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무등산)이라고 하고 서석산을 육지의 해금강이라 한다면

 해금강을 본 사람은 짐작할 것이다/

순흥 安씨 제실~~ 경북 영주군 풍기면 소수소원 소재지가 순흥.

순흥도 사연이 좀 있는데,

원래 고려 충령왕 이후 3명의 왕태(王胎) 봉안처라 순흥 도호부로 격상.

조선 세조는 왕위 찬탈 후 동생 금성대군을 순흥부에 위리안치시켰고.

이후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류되 사사되었는데 순흥부도 같은 처지가. 순흥부서 순흥현으로 강등.

 

그땐 색바랜 스레트 지붕에 토담을 두른 건물들이 길 따라 쭈욱~~ 보리밥,닭백숙 팔던.

깨끗이도 정비되었네.

 

광주를 관통하는 광주천의 시원인 증심사계곡~~

그런데 계곡 초입 이곳이 좀 특별하다는.

 

이 작가를 아시는지???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의 대표작 '日出而作'

의재(毅齊)허백련( 許百鍊, 1891∼1977)은 이곳 증심사 계곡서  해방 후 30년 동안 작품활동을.   

계곡 좌우로,

1)의제의 삶과 작품 공간인 춘설헌,

2)춘설차를 재배하던 삼애다원,

3)내방객과 풍류를 즐기던 광풍헌,

4)의제 미술관,

5)그리고 그의 묘가.

 

의재를 알려면 남종화 계보를 알아야할 터.

남종화 중시조는 진도 운림산방의 소치(小癡) 허련.(1809~1892)

소치는 허균 후손으로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직계.

진도서 태어난 그는 해남 윤선도 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방작(倣作)하면서 전통화풍을 익혔고.

대흥사  일지암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 문하에 들어간 후 대원군과 친교하며 현종의 어진을 그리기도.

추사가 죽은 해에는 진도로 낙향  '운림산방'을 짓고 작품에 몰두,,,이후 운림산방은 호남화단의 자궁같은.

소치가 죽고 그의 맥은 아들인 미산(未山) 허형(1861∼1937),손자인 남농(南農) 허건(1907∼1987)으로.

미산(未山) 이후에는 남농과 대별되는 다른 흐름이 있었으니 바로 무등산의 의재(毅齊) 허백련(1891~1977).

의재는 소치 방손(傍孫)이기도 한데 미산 허형 아래서 훈도를.

같은 시기 남농은 목포, 의제는 광주에서 남종화의 맥을 이으니 둘은 호남 화단의 쌍벽.

 

화풍의 차이는 있을 터, 

남농은 전통 남화를 바탕으로 한국적인 세계를 사생하는 진경산수화를, 반면 의재는 관념 산수화.

멀리 진도 운림산방에서 시작된 남종화 맥은 하나는 목포 유달산의 남농미술관으로,

다른 하나는 광주 무등산의 의재미술관으로 정리된 것.

의재는 해방 후엔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틀어밖혀,

1)시,서,화뿐만이 아니라 

2)덴마크 모델로 삼애 농업학교를 세우고,

3)다원을 가꿔 상품화하고,

4 ) 단군정신 고양에 힘쓰고 ,후학을 가르치고 사회운동가 기질까지.

 

증심사 뒷편 춘설차의 고향 '삼애 다원'~~

멀리 무등산 중봉 능선이.

일본인이 시작했으나 해방 후에는 의재가 나서 최초의 국산차 브랜드인 '春雪茶'를 개발했고.

눈덮인 무등산서 올라오는 연둣빛 봄의 기운을 계곡 아랫 사람들보다 먼저 느끼고 싶었을 테지.

춘설차는 춘설헌에 모여든 예인들과의 촉매제였고. 의재는 해방후 '茶 문화' 대중화의 공신으로.

그가 평소  말하길,

/고춧가루를 많이 먹으면 성질이 급해져 나라가 망하고 차를 마시면 차분해져 나라가 흥한다/

 

해방 직후부터 1977년까지 30년 남종화의 산실 춘설헌(春雪軒)~~~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라 했던가.

많은 시인문객들이 모여드니 춘설헌은 해방 후 예향 광주의 사랑방.

그는 사회 활동가이기도 했는데 일본서 송진우,김성수,길철수와 절친했던 연유등으로.

김철수(1893~1986)를 아시는지??

1921년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결성,,,길일성 보다 한길 앞선 인물.

일본 유학 시절부터 중국 공산당 창립멤버인 진독수와 교류하고,모택동과도 서신 교류했으며,

김일성도 지운을 선배로 생각했던 좌익의 거물.

9년 투옥 후엔 '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좌우 병존론에 따라 해방후엔 남한에 머물던.

당연 공안의 감시에다 옥고까지. 의제는 그런 김철수 옥바라지에 출옥 후에는 춘설헌에 불러 동숙을.

최남선,이은상,서정주도 단골이였고 함석헌은 제자로서 춘설헌을 들락날락,,고은은 20대부터.

 

어디 이뿐인가.

<생의 한가운데서>, 그리고  윤이상과 대담집 <상처받은 용>으로 한국 사랑이 특별했던  루이제 린저(1911~2002),,,

그녀는  1975년 춘설헌을 찾았고.

<25시> 작가 게오르규(1916~1992)는 의제의 도인 풍에 반해 두번이나.

왜 25시인가???

25시는 최후의 시간 다음에 오는 시간, 즉 메시아 의 구원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시간. 

그는 서구 산업사회가 멸망하는 환상을 상징적 으로 표현하였고.

이미 속도에 중독된 서방적 삶의 방식에 회의하고 있던 게오르규,,,

그런 그가 도포차림에 바람소리 뒤로한채 무등산을 유유자적하는 노인에게서 어쩌면 시원한 한줄기 바람을 느꼈을 지도. 그는 이후 한국을 '새 고향'이라고 부르며 1974년 이래 5차례나 방문.

그리고  <한국찬가>를 출간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

두번째 방문시 둘 사이 나눈 대화 한토막!

게오류규----"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존재입니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처럼 산소가 부족한 것을 제일 먼저 느끼는 존재라는 것.

의재----"동양에서는 난초와 같다고 그럽니다.그런데 세상이 탁하면 난초가 죽습니다."
알듯 모를듯 선문답에 게오르규는 의재의 손을 꼭 잡았다나.

의제 미술관~~

옛 삼애 농업햑교 자리로 춘설헌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1백 미터 거리에.

당시  의재를 찾아온 화가 지망생들은 반드시 농사일을 했어야. 땀 흘린 뒤에 그림을 그리라는.

생전 할아버지 차수발에 벼루를 갈던 장손자 허달재가 관장으로.

그는 홍익대 미대를 나온 동양화가로 뉴욕 주립대에서 객원교수를. 

   

의제 유적지를 뒤로하고 계곡 따라 10여분 오르니.

증심사(證心寺) 입구~~

증심사 일주문~~

일주문 옆으로 고승들의 부도,부도비들이~~

증심사는 신라말 쌍봉사서 입적한 철감선사가 창건.

쌍봉사엔 그의 부도가 있고(국보)

왼쪽으로 승용차 앞 수도승!

꽃비  맞으며 맹진 중.

지선이 주지로 있던 곳,' 무등산 풍경소리' 산사음악회로 유명한 곳,,,,

증심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나 보다.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니.

오마이 갓! 핸펀 문자중이였어.

얼마나 많은 이가 무등산을 올랐을까?

산에들 환장한 요즘이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많이들 올랐지.

가끔은 산행 산문기 도 남겼으니 당시 언어로 '유산기(遊山記)'

현재 약 560편 정도 남아 있구.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있을 때 지리산 오른 후 '두류산 기행'(頭流山紀行)을,
그의 제자 김일손도 정여창을 대동하고 16일간 지리산행 후 '속두류록'(續頭流錄)을,
풍기군수 시절 퇴계는 소백산에 올라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오대산 소금강 지역을 오른 이이는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를,
남명 조식은 천왕봉 아래인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지리산을 12번이나,,그리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번암 채재공은  63세에 관악산을 오른 후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은 무려 83세에 관악산을.

우담(愚潭) 정시한(1625~1707)은 명산을 두루 섭렵 후 산행기의 고전 '산중일기'(山中日記)를.

명산 무등산에 유산기가 없을리가.

압권은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서석=무등산)과

심춘순례에 실린 육당 최남선의 '무등 산상의 무등등관(無等等觀)',,,, 그리고 이은상에 '무등산 기행' 

유서석록(遊瑞石錄)은 제봉이 의병장으로 나서기 20년 전 41세 작품.

'무등 산상의 무등등관(無等等觀)'은 육당의 35세 때.

제봉은 1574년 봄날 5일간 등정 후 소회를 5천여자 한문으로.

등정은 당시 74세의 광주 목사 갈천 임훈(林薰)의 동행 요청에 따라.

그럼 왜 임훈이 제봉에 동행을 요청했을까?

그는 광주 광산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무등산을 자주 올랐고,

또한 등정의 마지막 코스가 무등산 북사면에 위치한 소쇄원,식영정,환벽당이다는 점도 고려됐을 터.

제봉은 당시 이곳서 소쇄원 주인 양산보,송강,김인후,식영정 주인 임억령 등과 교류하고 있었으니.

그는 임훈으로 부터 동행 권유를 서신으로 받고 하루 앞서 증심사에 도착.

다음 날 아침 임훈 일행이 야복 차림으로 도착하자 증심사 주지의 가이드 받아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

지체 높은 광주목사는 대나무로 엮은 가마를, 악공들은 뒤를 따랐고.

(소백산 이황 등도 가마를,비숍의 금강산 등정 때도, 고려 이인로는 지리산 청학동 찾아 소 두 마리에 짐을 실고)

 

그런데 그런데,,,,

우연히도 나의 오늘 코스는 450년전 이들 제봉 코스와 일치하더라는. 육당하고는 역순이였고.

육당은 1925년 봄 첫날을 북사면 원효사서 일박 후 서석대,정상,입석대를 오른 후 저녁 늦게 증심사에 도착했다는.

육당 일행은 껌껌할 머리에 겨우 겨우 증심사(證心寺)에 당도하였는데  육당은 당시 증심사를 평하길,

/ 시방은 다른 큰절들이 다 영락해 버렸고 무등산에서 최대의 도량이다/

 

제봉 고경명(1533-1592)이라,,,,

장흥이 본관으로 충장공 김덕령(무등산 북사면 충효동 출생)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장.

그는 중앙서 홍문과 교리등을 역임하다 60세 낙향 직후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았고.

둘다 대과 급제한 두 아들을 이끌고 무등산서 의병 6000을 모집해 북상해 금산전투서 둘째 아들과 함께 전사.

세아들  중 둘째는 아버지 제봉과 함게 금산 전투서,첫째는 숙부와 함께 진주성 전투서 전사.

또 다른 숙부는 제주도로 군마를 조달하러 갔다 풍량에 익사.

그러니 세형제에 두아들 총 5명이. 초기엔 김덕령도 제봉 휘하에.

조선시대 노블리스 오브라주의 최고봉.

증심사를 나서 본격 산행,,,흙산에다 좌우가 대밭.

대밭이 있다는 것은 일대가 민가였다는 반증.

 

증심사 뒷편 삼애다원이 보이고~~

 

양지꽃~~

높은 산등성이에 당산나무가 보이네.

당산나무가 있는 걸로 보아 예전엔 일대가 마을이~~

치마폭 보다 더 넓은 무등산은 사람들을 참 많이도 불러모았나보다.

 

 

 

하늘을 닮은 현호색~~

 

중머리재 오르기 직전~~

제봉은 깔끄막을 줄지어 힘들게 오르는 일행들의 행렬이 참 웃겼나보다.

/깍아 세운 듯한 가파른 길은 하늘에 다을 듯하고 사람들은 마치 물고기를 꿰미에 꿰어놓은 듯하다.

 꿰미가 줄지어 서로 붙들고 개미 기어가듯 기어간다/

 

 

제비꽃~~

 

 

중머리재,,, 중령(中嶺)이라는 뜻.

중령 마루에 오른 후 제봉이 이르길,

/이윽고 평평한 곳에 이르니 시야가 탁 트이며 상쾌한게 마치 바다에서 배 뚜껑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보는듯하다/

이어 다음 목표인 장불재(우측 철탑)로 향하면서,

/중머리재에서 다시 나아가니 우거져서 햇살을 볼 수없고 높고 험한 등성이는 허공에 걸쳐있다.

 허나 지팡이에 의지하고 노래를 읊조리니 잠시나마 힘겨움을 잊는다./

 

중머리재서 바라본 광주~~

고봉도 나도 저 골짜기 따라 올라왔다.

 

개별꽃~~~

별처럼 생겨서. 별꽃은 변이가 참 많다.

생강나무꽃~~

안보이던게 8부 능선에 이르니.

생강나무의 식생 지대는 중북부 산간인지라 남쪽이라도 고산지대라 이리.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생강나무는 후추나무로 개명되어야할듯. 줄기를 꺽어 냄새를 맛아보니 생강이라기 보다는 후추 향이 더.

당시 후추 사용이 일반화 되었더라면 그들은 후추나무꽃이라 했을지도.

아니,후추도 나무 열매에서 나오니 신후추나무라 했으려나?

우리나라에 후추가 들어온 시기는 고려 이전. 허나 워낙 귀중품이라 백성들은 보기도 힘들었지.

 

생강나무 사이로 장불재가 보이고~~ 이제 장불재가 코앞.

예전엔 장불재 바로 1백여미터 아래에 냉천정(冷泉亭)이 있었는데,,,. 

이름 값하며 냉천정은 화순 이서,동복(적벽으로 유명)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던 요긴한 쉼터.

바위틈서 흘러나오는 냉천은 광주천의 시원인 용추계곡 시발점.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광주목사가 기우재를 지내던 곳이라.

일행은 여기서 미수가루를 타먹으며 휴식을 취했는데 제봉 이르길,

/임목사가 먼저 냉천정(冷泉亭)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샘물은 나무밑 돌틈에서 솟아 나오는데 그 찬맛은 도솔천에 미치지 못하나 단맛은 그보다 더하다.

 서둘러 미수가루를 타먹으니 좋은 간장과 단술(金醬玉醴) 맛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육당의 표현은 역시나~~~멋져!

/지지(地誌)에 폭포라고 적힌 것을 보고, 아랫재 못 미쳐서  통칭 '물통'이란 것을 구경갔다.

 비탈을 다 내려가니 암석이 우묵하게 들이 패인 속에 팔뚝만한 물줄기가 인공으로 낸 홈태기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폭포라 함은 마치 회충약 몇병 놓고 무슨 당대약방(堂大藥房)이라는 큰 간판을 붙이는 격이라 하겠다/

유쾌 상쾌를 넘어 통쾌한 것은,

/여름 한 철에는 광주(光州)·화순(和順) 같은 가까운 데는 고사하고, 나주(羅州) 등 멀리 수백리 밖에서까지

 지병을 다스려 보려 하는 젊은 부인, 늙은 여인이 하루도 몇백 명씩 들이밀려 여자들의 희락원(喜樂園)을 이룬다는데,

 언제든지 짓궂은 사나이들이 다섯씩 열씩 떼를 지어 와서 어깨들을 비비며 분대를 놓는 폐풍이 있다 한다.

 내 진실로 광주 인사에게 고하노니,

 웅덩이 물은 꿩으로 하여금 쪼아먹게 하고,바닷물은 고래로 하여금 빨아 말리게 하라!

 이 빼빼 마른 '물통'일랑 저 가녀린 아낙네에게 온통 맡기고,

 그대들은 가서 웅대한 폭포에 사나이만 가지는 굵은 티끌을 씻으려 할 지어다.

 내 같은 남자의 체면 위해 광주 남자에게 행여 그림자라도 이 물통에 가까이 말기를 간절히 권유하노라/

음~~~~~~

남성 심벌이 굵은 티클이렸다!

 

윗 상황을  정리하자면 신윤복의 ' 단오풍정( 端午風情)'~~~

물통(폭포)에서 아낙내들의 물맞는 것을 몰래 훔쳐보러,혹은 작업거는 남성들에게 육당이 내린 일침(一針)

허나 일제 때 일대는  광주시 식수원이라는 구실하에 바위를 폭파해 지금은 없고.

 

장불재(800미터)~~

예전엔 사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KBS 송신소가.

화순군 이서면,동복면 사람들이 광주 대인시장 양동시장으로 장보러 갈 때 넘던 길이기도.

'장보러갈 때 넘는 재'라고 해서 '장볼재->장불재'라는 설이.

반면 규봉암 스님들이 규봉암 쪽에서 볼때 '길게 누워있는 부처님의 모습'이라 '장불재(長佛재)'라는 설도.

장불재 이쪽은 광주시요, 저쪽은 화순군 이서면과 동복면인데,

육당은 /이쪽 저쪽 합하여 40리나 되는 큰 영이다/했고.

 

장불재서 바라본 동사면~~

앞산(안양산) 너머가 화순군 이서면, 그리고 광주시민 식수원인 동복수원지인 적벽 그리고 김삿갓이 객사한 동복면.

결국 김삿갓도 무등산서 일생을 마감.

멀리 희미한게 전남서 가장 높은 광양 백운산으로 두번째는 무등산.

백운산 맞은편은 지리산,그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고.

 

멀리 왼쪽으로 동복호가 보이고~~

난고 김삿갓(1807∼1863)도 1841년 장불재를 넘었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영월 객사서 실시된 백일장에서 조부를 조롱했다는 자책으로 전국을 주유하던 때가 22세.

그런 그가 화순군 동복(사진 앞산 너머 우측)에서 초분할 때까지 3번을 화순을 찾았고 마지막도.

첫 장불재를 넘었던 이유도 적벽(赤壁) 때문만은 아닐터. 장불재 바로 위 입석대,서석대도 볼겸해서겠지.

적벽은 100미터 단애 앞으론 하천이 흐르고.(지금은 광주시 상수도원인 동복호로 잠겨 적벽 절반만이)

적벽은 옹성산(윗 사진 동복호 뒷산)이 만들어낸 천예의 오묘함이 소동파 적벽부의 적벽과 닮았다해서 붙혀진 이름.

앞을 흐르는 하천의 원류는 무등산과 백아산.

 

백아산이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 아니던가?

그래! 소설 '태백산맥'에서지,,,주인공들이 연이여 죽어가며 소설도 끝나가는 시점.

지리산과 무등산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험한 산세로 한국전 당시 빨치산 전남 총사령부가 주둔했고.

당연 빨치산과 토벌군의 혈전이 벌어졌으니 오끼나와 미공군까지 나서 공습을.

적벽엔 당연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았으니.

특히 무등산 입석,서석대를 찾은 자들은 관성으로 장불재 저 아래 적벽으로 내려왔고.

제봉 일행은 규봉을 들러 적벽으로 갔는데,

/항아리 모양 같은 옹성산(甕城山)을 바라보니 산은 온통  골산(骨山)을 이루었는데 봉우리가 서로 쳐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며 어떤 것은 일어섰고 어떤 것은 엎드리기도 하여 형세가 꼭 싸움터에서 군마가 달리다가 잠깐

 멈춰서서 이 절벽이 된 것 같다. 천지조화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장관을 이룰수 있었겠는가 싶다.

 창랑천의 물이 굽이굽이 흐르는데 수심이 깊고 검푸른 빛깔이어서 감히 내려다 볼 수가 없다. 그쪽 사람의 말을 들으니

 석벽 속에 굴이 있어서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산울림처럼 되돌아온다고 한다.또 동복현감의 말을 들으면 높은 곳에서

 퉁소를 불고 돌을 굴리면 방아 찧는 소리처럼 울리는데 밑에서는 물결이 솟구치고 바람이 일어 성난 기운을 내뿜는 듯

 천둥치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 적벽이 얼마나 오지인지를 말하는데,

/ 이곳 적벽에서 동복현까지의 거리는 십여리가 된다는 것인데 원래 이곳의 땅은 황폐하여 인적은 드물고

 호랑이굴과 다람쥐의 구멍이 흔한 곳이었다/

삿갓쓰고 괴나리봇짐 메고 김삿갓도 장불재를 넘었으니~~

그도 100미터 위쪽 입석,서석대를 오른 후 규봉암 거쳐 적벽으로 갔을 터.

적벽에 이른  김삿갓! 삿갓을 치켜올리고는 옹성산을 이고있는 적벽을 우러렀고.

절경에 시심이 동했는지 괴나리 봇짐 속 지필묵을 꺼내고는 짤막한 시 한수.

 /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沙上流/

/무등산이 높다하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 하나 모래위에 있다/

(이 시는 객사 전 그가 머물었던 민가에서 발견)

 

장불재서 바라본 입석대(右) & 서석대(左)

멀리서 보면 그저그러치만 대면하면 생각이 180도 바뀌니.

 

완만하고 등산길이 잘 정비되어있어 남녀노소도.

 

입석대가 보이고~~

입석대 이르기 직전에 육당은 '서홉사' 얘기 하나를 전하는데,

/남으로 조금 가다가 뿌루퉁한 바위 밑에서 서흡사 터를 보니 이르기를 그 바위에 구멍이 있어

 하루에 서 홉씩 쌀이 절로 나오므로 그것으로써 불량(佛糧)을 삼아 절 하나가 넉넉히 유지되더니,  

 임진왜란에 어느 중이 상좌 하나를 데리고 피난을 하는데 날마다 쌀을 받아내기가 귀찮아서

 한 번에 무척 많이 끄집어낸 뒤로 쌀이 다시 나오지 아니하게 되었다/

절 주변에는 이런 교훈적인 얘기가 참 많은데 서홉사 얘기는 설악산 화암사에도,,,화암사 는 아예 벼 '禾' 화암사다.

 

'立'자가 저 돌기둥을 닮았네.

현 위치 1017미터.

 

해질녁에 도착한 제봉은 입석의 형상을 멋들어지게 표현하는데,

1)암자 뒤에는 괴석이 마치 진을 친 병사의 깃발 창검과 같고,

2)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하며,

3)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 같고,

4)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긴 홀(笏)을 들고 읍하는 모습이며,

5)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며,

6)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 포개놓은 듯하구나.

 

감탄하며 또 이르길,

/천지개벽에 돌이 엉켜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신공귀장(神工鬼匠)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쓴 것일까.

 누가 구워냈으며,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아미산(峨眉山)의 옥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정말 알지 못할 일이로다/

육당은 우주론적으로 접근하는데,

/ 부근 일대의 종교적 중심은 무등산. 무등산에서의 종교적 중심은 입석대(立石臺).

  그런데 천궁(天宮)으로 신전(神殿)으로 다른 아무 데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아니한 형승(形勝)을 가진 것은

  과연 입석대라 할 것이다/

아랫 여로 동네 사람들은 실제로 이곳을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으로 여겼다는.

 

이런 풍광에 사람들이 그냥 놔둘리가~~

제봉이 이르길,

/입석암(庵)은 입석대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아 우러러보면 위태롭게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렵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암자 동쪽에 또 하나는 서쪽에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암자들도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불멸의 주인'이 나타났으니 바로 저 亡子!

명당 따라 3만리,,, 후대 발복은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다'에 10원 건다.

누각을 세워 순례자 쉼터로 사용했으면 하는.

육당은  음택 풍수의 병폐를 새인봉(증심사 맞은편) 예를 들어 비판하고 있는데,

저 음택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1925년 이후에 들어선듯.

무등산 새인봉 음택풍수 비판을 통해 육당의 국토에 대한 사랑을 가름할수있으니,

 

/새인봉(璽印峰)이 겨우 아침해의 붉은 사모를 썼는데, 천제봉(天帝峰)을 향하여 길을 나섰다.

 천제봉은 무등산에 있어서 최후의 신앙적 대상이 된 곳이니 다니기에 거북한 서석 ·입석 등

 절정으로부터 차차 끄집어내린 배천(拜天)의 최후의 지점이다.

 그 밑의 천제등에는 시방까지 제천(祭天)의 단이 남아 있다.

 민족적 신앙의 잠재의식이 가끔 어떻게 치열한 세력으로 폭발하는 좋은 예증(例證)은,

 작년 가물에 광주 일대의 부녀들의 결사적 노력으로써 천제봉 일대의 모든 무덤을 파괴해 버림에서 본다 하겠다.

 이 천제봉은 고래로 근방 민중의 신앙적 최고 대상인 만큼 그를 신성시함이 다른 것과 유별하여

 어떠한 사유를 막론하고 시신(屍身) 같은 것으로써 더럽힘을 금하여 오던 것인데,

 이 봉에는 큰 명당이 있다 하여 구산광(求山狂)들의 침이 3만장(丈)이나 흘려오고

 더욱 정혈(正穴)을 얻으면 천자까지라도 난다는 통에 쉬쉬하면서 그 구멍이 어디인 것을

 현미경을 대다시피 찾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리하여 몰래 장사지낸 무덤이 꽤 많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신노(神怒)가 풀린 여부는 여기 말할 것 아니어니와

 작년 삼남(三南) 각지에 일어난 사실을 모아 보면 혈관과 혈관으로 몰래 내려오는

 국토적 영통(靈統)이 자는 듯 삭은 듯 도무지 숨기가 없다가도 한 번 격발만 되면 대 폭발력이 있음을 알면 그만이다.

 그것이 미신이라 하여도 그만이요, 유치한 관념이라 하여도 무방하다.

 다만 그가 〈옳다〉하는 바를 위하여 〈그르다〉하는 것을 절복(折伏) 구제(驅除)하려는

 한 마음 뿐으로 꺼리는 것 없이 용감히 나아가는 이른바 정기(正氣)의 소유자임을 알면 그만이다.

 시방까지도 이만큼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긴 국토적 최고 지상의 열렬한 호지자(護持者) 임을 보아,

 영원한 이 다음에도 그러할 것을 알면 그만이다/

 

웅혼하고 감동을 주는 글이란게 이런 거 아닐런지,,,정리하자면,

세인봉 주변은 천제에 제를 올리는 영험한 곳인데 명당이라며 몰래 몰래 무덤을.

세월은 흐르고 성난 민중들은 가뭄을 구실삼아 무덤을 다 파해쳤다는 얘기.

육당은 이런 행동을 민족정신,내지는 신앙의 장구함으로 보았고.

 

입석마다 공명심의 각자(刻字)들로~~

육당은 여기서도 열받아 힐난하길,

/어사(御史)에 아무개, 관찰사(觀察使)에 아무개 하고 무엄하게 더러운 이름들을 많이 새긴 것을 괘씸히 생각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지우노라니, 비 머금은 구름장이 오락가락 하는 통에 돌들이 흔들흔들 하여 보여서

 머리가 어뜩하여 진다/


육당이 말한 '御史' 각자가 윗사진 가운데 입석에서 보인다.

   

 

왼쪽 3단흔들바위!

제봉이 이르길,

/투구 철갑으로 무장한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400년 후 육당도 저걸 보고는 입석대(國土)를 거의 신앙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데,

/더욱 대(臺)의 한가운데 앞으로 불쑥 나와서 세 동강진 한 기둥이 특별한 자리에 빼어나게 서있는 것은

 입석대에서도 종교적 중심일밖에 없이 생겼으니, 조선 안에 선돌도 퍽 많겠지마는

 천작(天作)한 신전에 자연한 신체(神體)도 이만치 장엄한 것은 다시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또 이르길,

/돌로 이만치 기이한 것은 물론 금강산에도 없는 것이어니와~~/

 

입석들도 세월의 무게를 받아~~~

그러면 입석,즉 저 주상절리 (柱狀節理)는 어떻게 형성된걸까?

제주도의 주상절리가 화산폭발의 용암이 물을 만나 급속히 수축하면서 만들어졌듯,

이곳도 7천만년 전 분출한 용암이 찬 공기로 급속히 식으면서.

이어 각과 각 사이로 빗물이 파고들고 풍화침식으로 간극이커지면서 지금의 주상절리대를 형성.  

주상절리가 있으면 판상절리도 있을 터. 떡시루를 엎어놓은 듯한 판상절리 지형은 흔하고.

 

위에서 바라본 입석대~~

예전에는 아래뿐만 아니라 입석대 위쪽에도 많은 암자들이 있었고.

제봉은 입석대 위쪽의 불사의사(不思議寺)를 거쳐 염불암(念佛庵)에서 일박했는데,

4월 이였지만 정상 인근이라 바람이 드셌나 보다.

제봉이 이르길, /경치의 극치나 아깝게도 바람이 세어서 그곳에서 오래 견디기 어려웠다/

입석대를 떠나며 아쉬움을 토로하는데,   /뒤돌아보니 마치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서운하다/

 

    앞 능선이 억새로 한이름하는 백마능선,너머는 화순군~~~

육당이 이르길,

/대상(臺上,즉 입석대)에 서서 전라남도 일대의 일천 산, 일만 뫼뿌리를 쫙 내다보는 원경(遠景)은

 진실로 아무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산 그림이다.

 이때까지 일컬어 온 운문(雲門)의 그것 불출(彿出)의 그것은 여기 대면 다 어린애들이라 할 것이다.

 청랑한 때에는 바다도 물론 내다보인다 한다.

 조화의 장난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배포가 숭엄 장대(崇嚴壯大)하다.

 하느님의 이궁(離宮) 자리다 하는 직감이 생긴다/

 

육당은 증심사에서 1박한 후 입석대를 한번더 오르는데,

/거듭 입석대(立石臺)에 올랐다. 다시 보아도 하느님의 유의작(有意作)이지 결코 우연한 조화가 아닐 것이요,

 그렇다면 무한한 영광이 온통으로 드러난 신의 전당이지 다른 것은 도무지 될 수 없음을 믿을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행은  규봉암을 거쳐 적벽으로 갔다.

     

입석대서 서석대에 이르는 길~~

입석,서석대 중간의 승천암~~

이무기가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했다나.

자연산 디딤돌~~ 저게 풍화가 더 진행되면 입석 처럼 될 터.

얼마나 저 길이 행복했으면 제봉이 이르길,

/입석에서 동쪽 길은 험하지 않다.

  반석이 마치 방석같이 판판하게 깔렸는데 지팡이를 짚으면 맑고 높은 소리가 울린다/

지팡이를 짚으면 맑고 높은 소리가 울린다!! 나.

멀리 화순군~~

철감국사 부도로 유명한 쌍봉사(왼쪽 멀리)와 천불천탑의 운주사(우측 멀리)가 저기 어드메에.

철감선사는 이곳 증심사도 세웠음.

왼쪽은 절벽으로 서석대 주상절리대가~~

서석대(1100미터)~~

우측 정상은 군사지역이라 이곳이 실질 적인 정상.

재밋는 것은 같은 방향에 100미터 밖에 표고 차이가 나지않치만  서석대와 입석대의 분수령이 다르고.

서석대의 물은 영산강(榮山江)을 거쳐 서해로,

입석대의 물은 동쪽 동복호와 주암호에 담겼다가 보성강,섬진강을 거쳐 남해로 간다.

 

<下는 곧,,,티저 두컷>

서석대~~

 서석대서 바라본  광주호.

가사문학 정자문화의 산실 소쇄원,식영정,환벽당,명옥헌,송강정,면앙정이 저기에 있다.



 


Only Yesterday / Isla Grant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현진맘
    '12.5.5 7:38 PM

    광주 시민으로서 고봉 기대승을 기리는 월봉서원을 가보려고 맘 먹고 있었는데
    샘의 글을 읽고 자세히 알 수있어 너무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 2. 살림열공
    '12.5.5 8:02 PM

    우와~
    무등산은 딱 한번 가 보았어요.
    이런 좋은 글을 먼저 읽고 갔었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군사지역이라는 정상쪽을 작년에 잠깐 개방했지요.
    인산인해...그날 갔었어요.

  • 현진맘
    '12.5.6 9:11 AM

    살림열공님 개방한 날 오셨군요.
    저도 거기 있었네요 늦게나마 반가워요.

  • 3. hisosan
    '12.5.6 11:50 PM

    오월에 읽는 무등산,,, 맘이 이상하게? 아프네요.
    그리운 멋진 고향!

  • 4. 덕이
    '12.5.7 12:50 PM

    날마다 보며 자라서인지
    항상 푸근한 산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당연하게 오르내리는 무등인데
    이렇게 깊은 뜻까지 알게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정말 좋은 산이지요.

  • 5. intotheself
    '12.5.8 8:18 AM

    이름만으로도 역사의 무게가 가득한 산, 그래도 한 번도 못 가 본 산

    사진으로라도 만나보게 해주셔서 감사, 감사

  • 6. 하늘재
    '12.5.8 12:23 PM

    무등산이
    문화 예술,사상가들의 까페 였었군요.....
    깊이 있는 설명을 통해 "무등산 다시보기" 기회가 되었습니다....

    게오르규 얘기에 25시를 다시 보았죠..
    역시 명화는 시간을 초월 하더군요...
    안소니 퀸의 마지막 표정연기는 가슴 뻐근한 감동 이었구요...

    불과 70여년 전의 "요한 모릿츠"가..
    지금도 곳곳에 많이 있을겁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거대한 "力"앞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갈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요한 모릿츠" 일수도 있구요.....

  • 7. wrtour
    '12.5.8 11:40 PM

    현진맘님~~
    살림열공님~~
    hisosan님~
    덕이님~~
    인투님~~
    하늘재님~~


    반갑습니다,행복하시구요.
    빗나는 5월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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