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폰 하이에크와 76년 밀턴 프리드만이 각각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신자유주의와 통화주의정책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다.
신자유주의는 주로 남미와 터키, 아시아와 같은 제3세계에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대형금융사와 글로벌기업의 자본이 그 나라에 침투할수있도록 그나라의 경제를 개방시키는게 목적이다.
미국은 1975년 칠레에 친미 꼭두각시 피노체트를 내세워.. 군부구데타를 성공시켰고, 신자유주의 실험을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도 70년대 후반부터 연합하여 신자유주의를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는 부채(DEBT)를 통해 그나라에 덫을 놓는다. 부채의 증가에 주목하라.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첫 신호탄은 전두환 신군부의 80년 518 광주에서의 잔인한 학살 진압으로부터 시작되었고..그 결과물은 98년 김영삼을 통해서 IMF로 다가왔다.
80년 5월 22일 백악관회동
미국 국무부 장관 Edmund Muskie 국부부 차관 WarrenChristopher 동아시아 태평양 장관 RichardHolbrooke CIA 국장 Stansfield Turner 국가안보자문 Zbigniew Brzezinski 국방장관 Harold Brown CIA 한국지부장 Donald Gregg.. 이들은 모여 전두환의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승인했고 한미연합사 존위컴의 군대파병요청을 승인했다. 또한 미국 수출입은행의 존 먼로 회장의 한국 방문을 승인하여 한국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지하철 확장 건설에 외자 대출을 승인했다. 백악관 회동 몇시간후 주한미국대사관 글라이스틴은 한국의 국무총리를 만나 미국은 강경진압이 필요하다는것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5월 26일 윤상원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평화적 개입을 해줄것을 요청했으나..글라이스틴은 답변을 거부했고.. 결국 27일 군인들의 도청 공격으로 윤상원은 사망한다.
5월 31일 당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CNN 인터뷰를 통해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지연시킬수 있다" 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80년 6월 13일 미국 글로벌 기업 회장들과 만찬회동을 했다. 3M, 다우케미칼, 뱅크오브코리아, 걸프사 회장들과 만났다. 그리고 전두환의 정화사업은 즉시 가동되었다. 전두환은 열렬히 환영한 레이건은 전두환을 미국으로 불렀고.. 9월 22일 전두환과 데이비드 록펠러가 웃으면서 악수하는 사진이 뉴욕타임즈에 게재되었다. 3일후 한국정부는 외국인 투자 규제완화, 100% 외국인 기업소유, 해외유입 펀드에 대한 100% 해외송금, 외국인의 토지소유허용등에 관해 새로운 정책이 발표된다.
광주 유혈진압이 있은지 3일후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전문을 보냈다.
"미국외교정책의 기본적입장은 한국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는것이다. 그러나 안보에 대한 선점과 한미관계에서 볼때 우리는 한국과 수년에 걸친 경제와 상업적 관계를 잊어선 안된다. 1979년에 한국은 미국에 있어 13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이고 미국 대형은행의 한국 진출과 투자금액은 매우 크고..서로 맞물려 있다. 이것은 미국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매우 놓칠수 없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 글라이스틴은 한국에서 중앙집권정책으로부터 자유시장경제로의 이행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런점에서 볼때 광주에 대한 잔인한 유혈진압은 이러한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위한 신호탄으로 볼수 있는것이다.
80년 8월 2일 미국의 대형은행들.. 뱅크오브아메리카, 체이스맨하탄 뱅크 트러스트, 케미컬 뱅크, 하노버앤 시티뱅크들은 한국에 대한 중단기 대출을 주저했다. 그리고 한국전력은 원자력 건설7호기와 8호기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 받지 못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자신의 반대파들을 좀더 거세게 힐책했다. 그러자 그날 미국 국무부는 전문으로 다음과 같이 비밀 문서를 보냈다. " 한국의 KCIA국장을 제거한후 한국의 주요정치인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5000명의 군부 고위급, 중간급 간부들을 해고했고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후 전두환은 정화사업의 명목으로 삼청교육대에 67,000명을 보내게 된다.
비밀해제된 외교문서로 본 518과 미국의 역활
518의 배후는 미국
5.18 광주항쟁 36주기입니다. 지난 4월 17일에 공개된 외교문서가 다시 주목됩니다. 미국이 5·18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외교문서가 공개되었던 것입니다.
1979년 부마항쟁의 여파로 10월 26일, 군부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12월 12일, 전두환의 새로운 쿠데타를 바라봐야했습니다. 국민들은 강력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선포하면서 80년 ‘서울의 봄’을 짓누르려 하였지만 5월 18일, 광주에서는 전두환 신군부를 반대하는 투쟁으로 타올랐고, 이는 그대로 5.18 광주항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일개 소장 계급의 전두환이 어떻게 군부를 움직여 신군부 세력을 규합해 쿠데타를 벌이고,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하고도 뻔뻔하게 집권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미국의 지지와 후원, 방조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외교부가 지난 4월 17일에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1980년 8월 29일 박동진 외무부 장관과 면담에서 "미국 행정부는 이번(에) 전(두환) 장군께서 대통령에 취임하시게 됨은 한국의 국내 정세 흐름으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며, 다른 대안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한국정부로 인정한 것은 미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나라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은 바로 “미국의 전두환 정권 인정”이 있었기에 집권기반을 구축하고 7년간 군부독재를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를 막후에서 사주하였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은 1980년 5월 당시 정국에서 음으로 양으로 전두환 신군부를 후원하였습니다.
1980년 5월 7일,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워싱턴 국무부로 보낸 비밀전문에는 다음의 비밀사항이 들어있었습니다.
“한국군은 돌발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병력이동을 미군 사령관에게 알려왔음. CFA 산하 13특전여단을 5월 8일 임시임무수행을 위해 서울남동쪽 특전사령부로 이동하며, 11특전여단을 5월 10일 김포반도로 이동 재배치할 것임, 2개여단의 병력은 2천5백명이며 학생소요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할 것임”
이 대목을 보면 미국의 승인이 없이는 12.12 쿠데타도, 5.18 광주항쟁 진압도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국군의 평시 작전통제권이 대한민국 청와대에 있지만,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정부에 이양된 것은 1994년의 일입니다. 1980년 5월은, 평시에도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한미연합사에 있었습니다. 사실상 주한미군사령관이 국군의 지휘권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계엄군이 시위진압을 위해 병력이동을 하자고 하여도, 병력 이동을 사전에 주한미군 측에 보고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결국 미국은 계엄군의 행동 내역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엄군의 이동은 주한미군이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봅시다. 글라이스틴은 포항주둔 해병대 1사단의 대전 및 부산 투입가능성에 대해 “해병대 1사단은 한미연합사 [CFC] 통제하에 있으며 이동시 미국 승인 [US APPROVAL]이 필요하다. 이동 승인요청은 없으나 그러나 요청시 동의하게 될 것임[WOULD AGREE IF ASKED]”이라고 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한미대사가 한국정부나 신군부의 병력 이동승인요청이 아직 없었는데도, “요청하면 동의하게 될 것”이라면서 병력이동을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518 광주항쟁에 대해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신군부만 처벌받을 것이 아닙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한국군의 병력이동을 최종 승인한 위컴과 ‘80년 서울의 봄’의 긴박한 정국을 시시각각 워싱턴으로 타전하며 신군부를 후원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도 당연히 처벌해야 합니다.
미국은 몇몇 문서쪼가리로만 신군부를 후원한 것이 아니라 실질병력을 동원해서 전두환을 뒷받침했습니다. 광주항쟁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이 준비되던 5월 25일, 미국은 7함대 소속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부산항에 입항시키며 신군부를 지원하였습니다. 전두환이 전방부대의 병력을 후방으로 빼돌려 시민을 학살하면 전방지역의 안보불균형이 형성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대비하여 미국이 항공모함 코럴시 호를 부산에 진입시켜 휴전선 안보공백을 사전에 막으려 한 것입니다. 이는 곧 전두환 신군부에게 “북한 신경쓰지 말고 광주시민들을 마음놓고 진압하라”는 미국의 메시지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미국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자마자 전두환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하였고 전두환은 이 사실을 한국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집권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